아픈 여동생의 일을 대신 처리하느라 모 증권사 객장에 들어섰다. 창구에서 상담하는 사람 말고도 많은 투자자가 뒷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워낙 장이 좋다 보니 사람이 모여드는가 보다.
어떤 사람은 20%의 수익에 만족하며 웃는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큰 폭으로 오른 주식을 일찍 판 것을 후회하며 괴로워한다. 그도 이미 20%의 수익을 올렸다.
같은 수익률, 다른 반응. 무엇이 다른가. 능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능력.
우리는 수학을 잘하는 것을 재능이라 부른다. 음악을 잘하는 것을 재능이라 부른다. 언어를 빨리 배우는 것을 재능이라 부른다. 하지만 행복을 잘 느끼는 것은 재능이라 부르지 않는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낙관성이 학습 가능한 기술이라 했다. 다니엘 골먼(Daniel Goleman)은 감정 조절을 정서지능의 핵심이라 했다. 신경과학자 리처드 데이비슨(Richard Davidson)은 정서 스타일이 뇌의 특정 회로와 연결되어 있다고 증명했다.
이렇듯 뇌과학과 심리학은 이미 알고 있다. 행복은 능력이라는 것을. 개발 가능한 재능이라는 것을.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외부 성취만을 능력으로 본다. 학벌, 연봉, 직위. 이것들만이 측정 가능한 가치다.
내면의 평화? 일상의 기쁨? 그런 것은 운이거나 성격일 뿐이다. 이 말은 틀렸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산다. 성공한 사람 중에 불행한 이가 있다. 평범한 사람 중에 행복한 이가 있다. 차이는 외부 조건이 아니었다. 내면의 능력이었다.
어떤 이는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 아침 커피의 향. 산책길의 바람. 오후의 노을. 이런 것들이 그를 충만하게 한다. 어떤 이는 큰 성취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논문을 발표해도, 승진을 해도, 상을 받아도 공허하다. 마음은 늘 허전하다. 더 큰 것이 필요하다.
무엇이 다른가. 재능이다. 현재를 온전히 경험하는 재능. 비교하지 않는 재능. 충분함을 아는 재능. 감사를 느끼는 재능. 이것들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개발되기도 한다. 음악적 재능처럼. 수학적 재능처럼.
나는 이 재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나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너무 깊이 파고든다. 모든 것을 분석한다. 의미를 찾는다. 본질을 묻는다. 남들은 평범한 일상에도 그저 기쁘다.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남들처럼 쉽게 행복해지지 않을까."
고뇌하고 사유하는 순간 행복은 안개처럼 흩어진다. 분석하는 순간 기쁨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의미를 찾는 순간 순수한 경험은 사라진다. 이것도 능력의 부족이다. 생각을 멈추는 능력. 분석하지 않는 능력. 그냥 느끼는 능력.
직장에서 명퇴하고도 늘 활기찬 친구를 본다. 거의 매일 골프, 아니 파크골프를 치러 간다.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니?" 물었더니 웃으며 답했다. "생각을 안 해. 그냥 살아."
부러웠다. 물론 그가 진짜 아무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보다 더 단순하게 사는 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게 쉽지 않다. 생각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사유가 나를 붙잡는다.
루마니아 철학자 시오랑(Emil Cioran)의 말처럼 "사유 그 자체가 상처"다.
이것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둘 다다. 깊이 생각하는 능력 덕분에 나는 글을 쓴다. 가르친다. 철학한다. 예술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나는 고통받는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삶을 지나치게 고뇌하지 않고,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 나는 자주 그 무게에 눌려 깊이 잠수한다. 그래서 숨이 차다. 그들은 가볍게 삶의 수면 위를 유영한다. 하지만, 나는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들은 흐름을 탄다. 나는 바닥을 더듬는다.
어떤 능력은 다른 능력을 배제한다. 깊이 고뇌하는 능력과 편안히 즐기는 능력은 양립하기 어렵다. 모든 것을 의미화하는 것과 그냥 경험하는 것은 공존하기 힘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인정해야 한다. 나에게 부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이것은 실패가 아니다. 한계의 인식이다. 수학을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남들은 저렇게 기뻐하는데"라고 생각하지 말자. 남들은 남들의 능력이 있고, 나는 나의 능력이 있다. 그들은 평범함을 즐기는 재능이 있다. 나는 복잡한 생각의 재능이 있다. 다를 뿐이다.
셋째,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거대한 행복을 기대하지 말자. 대신 작은 순간을 포착하자. 기타를 칠 때 손가락의 감촉. 그림을 그릴 때 붓의 움직임. 글을 쓸 때 키보드의 두드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느끼자. 분석하지 말고, 경험하자.
넷째, 연습해야 한다. 재능은 개발된다. 매일 조금씩. 아침에 눈을 뜨면 한 가지만 의식하자. 숨. 들이쉬고 내쉬는 것. 생각 없이. 하루에 단 1분이라도. 생각을 멈추는 연습.
다섯째, 용서해야 한다.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쉽게 즐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멈추지 못하는 나 자신을.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재능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어렵다. 알아도 안 된다. 이해해도 바뀌지 않는다. 머리는 받아들여도 가슴은 따라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쓴다. 나는 그냥 단순하게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쓸 수는 있다. 나는 단순히 즐기지 못한다. 하지만 성찰할 수는 있다. 나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하지만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쓴다. 남들은 너무 자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냐며 의아해한다. 하지만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고통을 언어로 바꾸는 것. 괴로움을 문장으로 전환하는 것. 불행을 사유로 변화시키는 것.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 아닐까.
증권사 객장에서 나올 때 다시 그들을 보았다. 20% 수익에 만족하는 사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20% 수익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어느 쪽인가.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이 능력의 차이라는 것을. 우열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은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떤 이는 행복의 재능을 가졌다. 어떤 이는 사유의 재능을 가졌다. 어떤 이는 공감의 재능을 가졌다. 어떤 이는 창조의 재능을 가졌다.
동료 한 명이 물었다. "요즘 어떠세요? 행복하세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답했다. "글쎄요. 행복한지는 모르지만 의미는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차이죠?"
차이가 있다. 행복은 감정이다. 의미는 선택이다. 나는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의미는 만들 수 있다. 재능이 없어도 의지는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한다. 글을 쓴다. 기타를 친다. 그림을 그린다. 가르친다.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행복만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사유를 함께 추구하기로 했다. 행복은 아름답다. 하지만 사유는 깊다. 행복의 재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면 된다. 사유의 재능이 있는 사람은 깊이 살면 된다. 둘 다 가질 수는 없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선택했다. 하지만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평범한 일상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하지만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행복보다 고뇌를. 단순함보다 복잡함을. 편안함보다 사유를.
행복의 재능은 없지만, 정직의 재능은 있다. 단순함의 재능은 없지만, 깊이의 재능은 있다. 즐김의 재능은 없지만, 성찰의 재능은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나다.
객장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화면을 보는 사람들. 웃는 사람, 찡그리는 사람, 무표정한 사람. 모두 자기 방식으로 살고 있다. 나도 내 방식으로 산다. 의미 있게. 가볍지는 않지만, 깊이. 단순하지는 않지만, 진실하게.
겨울 해가 객장 유리창을 통과하며 사람들의 얼굴을 비춘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또 생각에 잠긴다. 이것이 나다. 멈출 수 없는 사유. 끝나지 않는 성찰. 그래도 괜찮다. 이것이 내 재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