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얗게 되었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추었다."
일본 최초 노벨 문학상을 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시작이다. 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첫 문장은 일본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도입부 중 하나로 꼽힌다. 터널이라는 경계를 통과하며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설국이라는 초월적 공간으로 들어선다. 현실과 이상향의 경계를 넘는 그 순간이다.
우리는 늘 현실을 벗어나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곳으로 가고자 한다. 부대낄 것도 없고, 의식할 것도 없고, 원초적 편안함이 있는 그곳으로. 특별한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대부분 희망 고문으로 끝날 따름이다. 이제는 사유보다 행동이, 희망보다 현실이 필요하다. 긴 방학이 시작하는 이번 겨울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소설 <설국>을 집필한 곳이자 배경이 된 곳은 니가타현의 에치고유자와(越後湯沢) 온천 마을이다. 그가 머물면서 설국을 써 내려간 료칸은 '다카한(高半, Takahan)'이다. 소설 속의 그 장면이야 지금 남았을 리가 없지만, 희미한 자취라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붙잡으려는 것은 아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완성한 그 료칸 다카한에서 잠시 일상의 터널을 벗어나 순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온천의 김이 피어오르는 창가에 앉아 끝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나의 설국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명확함보다 아름다운 것은 모호함이고, 예측 가능함보다 설레는 것은 불확실함이다. 안개 낀 아침처럼, 함박눈 내리는 밤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게 번지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본질에 가까워질 것이다.
묵은 책을 펼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말없이 눈발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기록하고, 나는 다시 고요 속으로 침잠한다.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래 잊고 지냈던 나와 재회하게 될 것이다.
1월이나 2월 초, 에치고유자와 온천 마을에서 눈처럼 순수한, 온천처럼 따뜻한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마침, 독서 동아리 <오후의 글방>에서 내가 발표할 책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다. 읽고, 토론하고, 그리고 설국을 다녀온다면 어떨까?
함께 떠날 이가 있으면 좋겠다. 칼날처럼 뚜렷함이 가득한 현실을 잠시 벗어나, 흐릿한 편안함 속에서 쉬어가고 싶은 이와 함께. 끝내 혼자라면 어때? 소소한 결심이 여행의 색다른 즐거움을 줄 것이다. 복잡한 일상에서 그런 여백을 한 번쯤 가져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