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에서 깬 아침의 생각
일요일 아침 눈을 뜨니 날이 환하다.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가끔 생뚱맞은 꿈을 꾼다. 전혀 현실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대형사건이 꿈에서 일어난다. 해결할 실마리를 찾지 못해 혼자 끙끙거린다. 눈앞이 캄캄하고 앞길이 막막해 크게 고통받는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도대체 왜 이런 꿈을 꿀까 곰곰이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좌절이 꿈으로 나타난 것일까. 요즘 일어나는 일이 머리를 복잡하게 한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최근의 상황을 하나씩 짚어 봤다. 그러자 짚이는 게 있다. 그걸 정리하고 털어버려야겠다.
한때 나는 내가 잘 난 줄 알았다. 얼굴이 아니라 머리를 말한다. 외모야 겉으로 번연히 드러나기에 우긴다고 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똑똑함과 영민함은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크다.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그런 착각 속에서 살았다.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 이상 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현실에서 열흘 이상 피는 꽃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요즘은 유전자 변형으로 피운 꽃은 꽤 오래 아름다움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속담이 말하는 속뜻은 영광이나 명성이 오래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생명체는 당연히 세월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시대가 변하면 기가 막힌 통찰력도 더는 맞지 않는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젊음도, 권력도, 영민함도 한 시절이 있고, 그때가 지나면 끝내 시들고 만다.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순간 노욕이 생기고 추함이 얼굴을 뒤덮는다.
‘장강의 앞 물결은 뒷물결에 밀려난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니다. 일에는 때가 있고, 기회는 머물지 않는다. 물은 끝없이 앞으로만 흘러갈 뿐이다. 앞 물결이라 해서 뒷 물결이 봐주는 법이 없다. 그러니 밀려나기 전에 먼저 새 사람을 위해 자리를 내주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 번 물레방아를 돌리고 난 물도 되돌아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나마 남은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손뼉 칠 때 떠나라고? 손뼉 치는 사람이 단 사람이라도 있으면 끝까지 남을 것이다”라고 어느 개그맨이 말했다. 그의 말 재치가 돋보인다. 손뼉을 치던 그 많은 사람이 떠나고 단 한 사람이 남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마 그도 그전에 떠날지도 모른다. 진짜 그때까지 남는다면 그의 배짱과 용기에 찬사를 보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정신력이 강하다면, 그건 노욕이 아니라 소신이라 봐줄 만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보니 내 욕심도 접어야 한다. 한때 무얼 하든 자신감이 넘쳤다. 행정 업무를 보든, 조직을 관리하든 꽤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내 생각과 방식이 잘 먹혔기에 그리 생각하는 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정점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환경과 여건이 내 뜻과 실행력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그건 내가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운때가 맞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온전히 내 능력으로 생각하는 착각에 빠졌다. 당시 CEO와 동료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런 성과를 보일 수 없었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내가 최종 결정권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내가 계획한 것을 마음껏 실천할 수 있었겠나. 그때 내가 보여준 실적은 팀워크의 승리이자 CEO가 보내준 전폭적인 지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한때 찬사를 받았고, 그 바람에 지금까지 내가 일 잘한다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시대고 변했고, 여건도 그때와는 달라졌다. 내가 다시 뭔가를 한다 해도 그런 실적을 내기 힘들 것이다.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착각 하나만으로 뛰어들기에는 녹록지 않은 환경이다. 며칠간 학내에서 진행되는 일을 지켜보면서, 내 시절은 그때 이미 끝났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더 미련을 갖는 것은 구차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
억지로 애쓴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한사코 노력해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많다. 성실하고 제대로 준비했지만, 성공이 눈을 돌리면 그뿐이다. 안타깝고 아쉽기가 한이 없지만, 운이 따르지 않으면 괜한 헛수고로 끝난다. 눈물겨운 일이 어디 한둘인가,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죽했으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졌어도 운 좋은 사람 못 이긴다는 했으니 내 운이 짧고, 그것이 다하면 만사휴의(萬事休矣)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인 노자(老子)는 무엇을 이루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운이 맞아 관직에 나가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깨끗이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그는 천하를 호령할 기개가 있어도 부름이 없다면 차라리 깊은 산중으로 가서 도를 닦을 것을 권한다. 속세를 떠나 있더라도 기회가 오면 그걸 마다할 필요가 없다. 저절로 관직을 맡게 되면 굳이 마다하지 않고 그때 제대로 일하라는 것이다.
노자는 일은 자연스레 되도록 해야 한다는 자연(自然)을 주장했다. 그는 되지 않는 일을 사람이 억지로 하는 인위(人爲)가 없는 무위(無爲)가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고 순리에 따라야 하고, 사람이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에 맡기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노자의 핵심 사상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손 놓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은 하지만,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는 것이다. 그 결과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으면 크게 마음 상할 일도 없다.
인위를 반대하고 무위자연을 옹호하는 노자는 흐르는 물과 같이 살라고 했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자신을 베풀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끝없이 높은 자리만 추구하는 사람과 달리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산에 막히고 돌에 막히지만, 이를 탓하지 않고 둘러 간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겨도 그 그릇에 순응한다. 질그릇을 싫다 하지 않고, 화려한 꽃병이라고 탐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유연한 생각과 사고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노자는 충고다.
그렇다. 내 자리가 아니면 머물지 말고 떠나야 한다. 놋그릇에 담긴 물도 제 역할이 있듯이 나도 또한 내 할 일을 찾으면 된다. 어쩌면 이미 찾았다고 하는 게 맞다.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티징(teaching)에서 코칭(coaching)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감히 견줄 바는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수업에 적용한 지 꽤 오래됐다. 그건 분명한 성과를 보였고, 학생들도 무척 좋아한다. 이마저도 내 착각일 수 있지만, 이런 오해는 받을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