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붓을 받고
다시 화실에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났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가다가 지금은 토요일 오전만 다닌다. 일주일에 한 번 가서 뭔 그림 실력이 늘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실력이 좋아지길 기대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취미를 잃지 않기 위해 간다는 것이 맞다. 어차피 속도를 빨리하는 건 힘들고 천천히 조금씩 그려보자고 다짐한다. 붓을 잡는 횟수는 줄었지만, 집중력은 더 높아졌다. 그나마 그걸 위안으로 삼는다.
지난주 토요일 주문했던 붓을 받았다. 바버라 600R 2호와 바버라 70R 14호를 담긴 상자를 풀었다. 톱니바퀴 모양의 종이에 곱게 포장한 새 붓을 손에 들었다. 이 붓들은 물감을 잘 머금고 끝이 뾰족해서 세밀한 색칠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 붓을 넓게 칠하면 도화지에 물감이 잘 밴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수채화 도화지로 캔손 아르쉬(Canson Arches) 항목을 주로 사용한다. 아르쉬 종이에는 황목 중목, 세목의 세 종류가 있다. 선생님께서 그중에서 질감이 제일 거친 항목을 추천해 주었다.
수채화는 물감에 물을 많이 적셔 그리는 그림이다. 일반 도화지에 물을 듬뿍 묻힌 물감을 칠하면 종이가 부풀어 오르거나 심하면 아예 구멍이 뚫리기도 한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려면 어느 정도 두께감이 있는 도화지에 작업하는 것이 좋다. 두께감도 있고 오돌토돌한 아르쉬 종이가 물감을 잘 흡수한다. 아르쉬는 물감에 물을 많이 적셔도 종이가 잘 변하지 않아 수채화를 그릴 때 많이 사용한다.
새 붓으로 색칠하는 기분이 좋긴 하다. 지금 그리고 있는 목련 꽃잎을 잘게 칠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잘난 목수는 연장을 나무라지 않지만, 나처럼 실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연장 도움을 크게 받는다. 좋은 붓이라 그런지 세부 색칠이 잘 먹히는 기분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 있지만, 가끔 내 기분에 취해 그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어떤 일을 하든 자기가 만족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그림 그리는 일은 특히 더 그런 것 같아 이렇게라도 자뻑에 빠진다.
다시 예전의 그림일기를 읽어본다. 지금 읽어보면 그때는 뭔 자신감이 그리 넘쳤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초보자가 용감하고, 뭘 모르는 사람이 과감하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수채화를 그렸지만, 달라진 점은 그림이 참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있다. 지금은 얼마나 어렵고,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려면 천천히 인내하며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모를 때니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면서 일기를 읽어본다.
초보자는 용감해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 6개월이 됐다. 아직은 그림 그리는 일이 즐겁다. 소묘가 잘 된다. 해바라기를 스케치하는데 마음에 든다. 연습할수록 감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스케치하는 순간에는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한다. 잡념이 없어지니 머리도 덜 피곤하다.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워낙 재주가 없다 보니 조금만 노력해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다.
일요일 깊은 가을 산에 올라서도 스케치했다. 지천으로 깔린 단풍에 일상의 번잡함을 내려놓았다. 둘레길을 돌다 산기슭 앉아 커피를 마신다. 짙은 갈색 커피 향이 산을 물들인다. 깊은 산골로 아니라 손 닿을 거리에 도시가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계절이 워낙 앉아 가을을 스케치해 본다. 다행히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길이라 혼자 온갖 폼을 다 잡았다.
산 초입에는 꽤 오래된 절이 있다. 하산 길에는 늘 이곳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를 드린다. 화려한 옷의 가을 자락에 묻힌 절 경내도 온통 울긋불긋하다. 얼굴이 단풍색으로 물든 대웅전 부처님의 얼굴이 참 보기가 좋다. 산도 절도 부처님도 깊은 가을에 젖었다. 때마침 노스님의 청아한 독경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 산을 오른다. 고즈넉한 산상의 오후 햇살이 투명한 비늘로 쏟아진다. 언덕에 있는 산신각 옆에 앉자 스님의 독경 소리를 그려보기도 했다.
모두 집으로 간 캠퍼스에 혼자 혼자 남아 스케치를 해본다. 지친 머리를 식히는 데는 참 좋다. 색칠에 몰입하는 동안 종일 분주히 움직였던 뇌는 휴식을 취한다. 다른 모든 생각이 끊어지고 오직 색칠에만 집중하니 참 좋다. 창밖으로는 짙은 어둠이 내리고 물감을 고르고 색칠하는 뇌 회로만 조용히 움직이고, 인다.
어떤 날은 종일 책을 보고 서류를 붙들고 씨름했다. 그런 날은 붓을 들지 않고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한다.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화풍이 시들해졌다. 그 바람에 사물이나 대상의 이미지를 중시하는 인상주의가 등장했다. 그림에는 그 시대의 철학과 역사가 담겨 있다. 화가들은 그런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서 자기 화풍을 개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의 글을 읽을 때마다 민망하다. 오래 그림을 그린 사람이 보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뭐 어쩌겠나. 내 수준이 그만하니 인정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땐 순진하고 겁이 없었다. 열심히 그리기만 하면 잘 그릴 줄 알았다. 손발이 오글거리지만, 그때는 이런 마음이었다.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인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런 깨침이 없어 오히려 행복하긴 했다. 비록 혼자 흐뭇해 한 그런 무모함이 그림을 계속 그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