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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Nov 17. 2022

남자에게 가혹한 21세기


먹이 추적자와 둥지 수호자

먼 옛날 남자들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들소를 잡으러 사냥을 떠났다. 사냥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성공의 확률이 높지 않은 위험한 일이었다. 사냥은 오직 사냥감에만 몰입해야 하는 목표 지향적 행동을 요구한다. 다른 생각할 겨를과 여유가 없다. 만에 하나 들소 떼를 자극이라도 하는 날이면 큰일이 난다. 그러니 오직 집중하고 집중해야 한다.


먹이 추적자인 남자들은 오직 덩치  들소 뒤를 살금살금 뒤쫓는다. 들소를 잡지 못하면 가족들의 배고픔을 채울 길이 없다. 마음은 급해지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오직 목표물인 들소에만 신경을 쓴다. 남자들은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장의 존재감을 상실한다. 그건 남자들에게 무척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일이다. 이런 사냥의 습성이 남은 남자가 뭔가에 깊이 몰입하고 있을  말을 걸면 버럭 화를 낸다.


다행히 산만한 들소  마리를 잡았다. 남자들은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동굴에 모여 잔치를 벌인다. 그제남자들은 한껏 어깨를 펴고 목에 잔뜩 힘을 준다. 목표에 성공하고 뭔가 일을 이루고  후에야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사냥에 실패하거나 일이   풀리면 남자들은 말을   한다. 남자들이 동굴 속에 틀어박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혼자 고민하는 습성이  때문에 생겼다.


여성들은 과일과 채소를 모아 아이를 돌보는 여성은 이웃과 두루두루 사귀는 관계 지향이다. 거친 들판에서 무엇을 먹어야 좋을지 정보를 구한다. 어떤 식물을 먹을 수 있는지 대화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 남자들의 사냥과 달리 채집은 요모조모 잘 따져봐야 한다. 이웃집 여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 정보를 얻는다. 또 야생 동물로부터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여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 기술이 발달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게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앨런 피즈·바바라 피즈는 저서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김영사, 2011)에서 남녀의 생각 차이를 진화과정에서 생성된 두뇌 구조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설명한다. 진화과정에서 남자는 사회적 역할이 목숨을 걸고 사냥하고, 적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했다. 그래서 남성의 두뇌는 먹이 추적자로서 진화했고,  결과 의사소통보다 목표지향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반면에, 여성은 아이 양육자와 둥지 수호자의 역할을 담당하였기에 의사소통과 사회적 관계 형성에 뛰어난 역량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사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고단백질의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무척 중요했다. 이것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 들소나 사슴 같은 덩치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다. 과일과 채소는 기초 대사를 유지하게  주지만, 사슴이나 들소는  번에 많은 에너지를 공급한다. 남성이 사냥에 성공해서 돌아오면 고기를 배불리 먹을  있었다. 사냥의 시절에는 남성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사냥에 성공한 남성은 발소리도 요란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야성의 사냥터는 사라지고 세상은 변했다.

산업혁명이 성공하면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야성의 사냥터는 사라졌다.  이상 사냥감은 들소나  달린 수사슴이 아니다. 사냥터에서는  이상 날카로운 칼과 창을 필요로 하지 다. 섬세한 손끝과 감성적인 소통이 대우받는다. 정글 속의 사냥터가 공장이나 사무실로 변했다. 새로운 사냥터에 여성들이 등장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야성의 들판에서 보였던 남성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새로운 사냥터에는 새로운 질서가 등장했다. 힘과 완력이 아니라 소통과 대화가 중요하다. 오직 목표지향적인 행동만 필요한 시대는 지났다.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자세가 요구되는 시대가  것이다. 여성들은 다행히도 이런 자세가 이미 몸에 배었다. 문제는 남성들이다. 남성들은 시대적 변화와 새로운 사냥터에 적응해야 한다. 새로운 사냥터가 등장하고 정착한  겨우 수십  남짓 지났다. 수백만 년간 남자들의 DNA 자리한 사냥의 본능을 바꾸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앨런 피즈·바바라 피즈는 또 다른 저서 『밝히는 남자 바라는 여자』(김영사, 2012)에서 이렇게 말한다. 1960년대 초 이전에 태어난 남자들은 숙녀를 배려하고 숙녀 주변에서는 상소리를 하지 말아야 하며, 맥주를 잘 마셔야 한다고 배웠다. 당시 할리우드 최고 스타인 존 웨인 같은 거칠고 강하면서도 여자에게 존경심을 잃지 않는 남자가 필요했다. 1970년대가 되면서 여성들은 더 주체적으로 변했고, 남자들에게 “여자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기”를 요구했다.     


이들은 여성의 요구 사항은 남성의 두뇌 회로에 들어있지 않은 탓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남성들은 당황한다. 남자들은 이전의 미덕,  마초적이고 남자다운 행동을 찾아 뒷걸음질 친다. 자동차, 밀리터리, 컴퓨터, 스포츠 경기 기록 등에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직 남성들의 머리에는 사냥터의 추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산업화와 더불어 사냥터는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완벽남은 직장에서는 유능한 전사, 의상과 요리에 관해서는 경이를 불러일으키는 지식남, 침실에서는 종마, 체육관에서는 초콜릿 같은 복근을 자랑하는 짐승남, 완벽한 아버지, 여자들의 고민에 끝까지 귀 기울이는 친구,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타이타닉> 같은 영화를 볼 때는 눈물을 흘리는 감성남이어야 한다고 앨런 피즈·바바라 피즈는 말한다.      


그들은 21세기 완벽남의 요구조건 목록이 점점 길어졌기에 남자들이 축구 경기, 자동차 대회, 술집으로 몰려간다고 말한다. 거기에서는 여전히 남들 보는 데서 남자처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앨런 피즈·바바라 피즈는 ‘남자에게 가혹한 21세기’라고 주장한다. 과장이 심하긴 해도 이들의 주장이 남자들의 귀에 솔깃하게 들린다.      


초원을 잃어버린 라이언 킹


사자 군단을 이끌고 세렝게티 초원의 수사자 라이언 킹은 살금살금 물소 떼를 쫓는다. 그중 한 마리를 눈여겨본 라이언 킹은 숨죽이며 공격 기회를 엿본다. 전투대형을 갖춘 사자 군단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결정적인 순간 라이언 킹을 선두로 사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라이언 킹은 덩치가 태산만 한 물소의 목덜미를 깨문다. 물소가 엄청난 힘으로 사자를 떨쳐내려 몸을 흔든다. 한 번 사냥감을 문 라이언 킹의 억세고 날카로운 이빨은 물소의 목덜미를 놓지 않는다. 이 틈을 타 암사자들이 물소를 물어뜯는다.     


물소와 사자 군단의 목숨을 건 치열한 싸움이 끝날 줄 모른다. 힘이 천하장사인 물소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몇몇 암사자들은 물소의 힘에 저 멀리 내동댕이쳐진다. 사자 무리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된다. 라이언 킹에게 물린 목덜미에서 피가 솟구친다. 물소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든다. 이렇게 사냥은 끝나고 사자들은 즐거운 만찬을 즐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렝게티 초원의 위풍당당한 수사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수사자의 본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실 수사자는 무리 사냥에 나서지 않는다. 세렝게티 초원의 살벌한 야생에서는 어린 새끼를 지키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무리가 사냥을 나가고 난 후, 다른 사자 무리나 하이에나 무리로부터 새끼를 지키는 것은 암사자보다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수사자의 몫이다. 수사자는 암사자가 사냥해 오면 제일 먼저 고기를 차지한다.      


비록 수사자가 사냥을 지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리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멋진 갈기를 휘날리며 야생의 숲속에서 암사자와 새끼를 보호하는 든든한 방패가 된다. 그러나 초원을 잃어버린 수사자는  일이 없다. 무리에서 쫓겨나 혼자 배회하며 먹이를 훔쳐 먹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그마저도 힘이 달리는 늙은 수사자는 풀을 뜯어 먹으며 하루를 연명한다. 야성의 숲을 잃어버린 수사자의 모습에서 ‘남자에게 가혹한 21세기 모습이 보인다면 너무 예민한 건가?


그렇다고 야성의 사냥터를 잃어버린 남자들만 힘든 걸까? 그건 아니다. 사는 건 남녀 모두가 힘들다. 자본주의의 냉엄한 자본은 여성이라고 호락호락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옛날과 비교하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유리천장은 높고, 여전히 차별은 남았다. 그 사이 여성의 발언권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건 지금까지 역전된 남녀의 사회적 위상이 제대로 자리 잡는 과정일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자본의 차이에 있다. 21세기의 가혹함과 덜 가혹함은 그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남녀에게 각기 달리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사회·경제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면, 21세기는 남녀 모두에게 가혹한 시기다. 그렇지만, 바뀐 사냥터에 적응이 더딘 남자들이 좀 더 힘들다고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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