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합지졸 후궁들을 일사불란하게
“아이고 안 되겠다. 빨리 도망치자!!”
“그래, 삼십육계다. 걸음아 나 살려라!!”
어릴 때 많이 들어본 삼십육계 줄행랑 전법이다. 이것은 병법서(兵法書)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최후 계책이다. 하다 하다 안 되면 냅다 도망치는 것이 좋다. 도망친다는 데야 상대도 뾰족한 수가 없다. 앞도 뒤도 안 보고 그저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것이 최고다. 한마디로 눈썹을 휘날리며 줄행랑치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고대 병법서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손무(孫武, 기원전 545년경~기원전 470년경)가 쓴 『손자병법(孫子兵法)』이다. 이 병법서는 미국 등 여러 나라의 군사 학교와 심지어 하버드 대학 비즈니스 스쿨의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이름이 높다.
손자병법의 저자는 손자(孫子) 혹은 손무(孫武)라 이름한다. 손무는 본래 제(齊) 나라 사람인데 오(吳)나라 산골에 숨어 오로지 병법만 연구했다. 세계사에서도 명성이 더 높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저술했다. 손무는 병법과 전략에서는 천하제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세상 사람들은 손무가 누군인지조차 몰랐다.
오나라의 재상 오자서(伍子胥, 기원전 559년~ 기원전 484년)는 손무가 뛰어난 병법가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합려(闔閭, ? - 기원전 496년)와 군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손무를 극찬했다. 오자서는 성가실 정도로 손무를 만나볼 것을 청했다. 마지못해 합려는 손무를 만나본다.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출세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어쨌든 합려는 긴가민가하며 손무를 만났다.
"짐은 당신이 쓴 13편의 병서를 모두 읽었소. 대단한 병술이요"라고 합려는 말했다. 그리고는 손무에게 직접 군대를 지휘해 볼 것을 요청했다. 모두 여성인 후궁들을 지휘하라고 말한다. 합려가 손무의 지휘 능력을 시험한 것이다.
손무는 왕의 후궁 180명을 모았다. 그는 여성들을 두 편으로 나누고, 왕이 총애하는 후궁 두 명을 각 편의 대장으로 삼았다. 손무는 그들을 상대로 훈련을 시작했다.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도록 했으나 후궁들은 깔깔거리며 웃고 난리다. 손무는 꾹 참고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려도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한 번 더 명령을 내리겠다. 이번에도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대장들의 목을 벨 것이다" 하며 손무는 큰 소리로 알렸다.
후궁들을 들은 척도 않고 웃고 떠들고 시끌벅적했다. 약속대로 손무가 좌우 대장의 목을 치려고 했다. 왕은 자신이 아끼는 여인들의 목을 치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급히 손무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명을 전했다.
"과인은 이미 장군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았소. 과인은 이 두 후궁이 없으면 밥을 먹어도 단맛을 모르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시오."하고 합려가 애원했다. 이들은 합려가 체면 불고하고 부탁할 정도로 아끼는 후궁들이었다.
손무는 왕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가차 없이 두 후궁의 목을 베어버렸다. 촉(蜀)의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이 지시를 따르지 않아 적에게 대패한 마속(馬謖)의 목을 울며 베었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과 다를 바 없다. 왕의 눈물을 뒤로하고 후궁들의 목을 베었으니 읍참후궁(泣斬後宮)이라 할 만하다.
손무는 다음으로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들을 대장으로 삼고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이 장면을 본 여인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겁에 질렸다. 감히 입도 뻥긋하지 않고 여인들은 손무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자로 잰 듯, 먹줄을 긋듯, 정확하게 움직이고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손무는 성공적으로 훈련을 마무리했다.
졸지에 총애하는 후궁을 두 명이나 잃은 합려는 속이 쓰렸지만, 손무의 뛰어난 용병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손무가 오나라의 장군이 됐다. 그 뒤, 손무의 지휘를 받은 오나라 군대는 서쪽의 강대국인 초나라를 무찔렀다.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晉) 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군사력이 막강해졌다. 병법의 천재인 손자 덕분에 합려는 제후들 사이의 강자로 부상했다.
유순한 지도자가 민주적이기만 하면
조직 관리에서 상벌(賞罰)이 엄격하지 않으면 명령이 서지 않는다. 만일 손무가 왕이 총애하는 여인들이라 봐주기라도 했다면 군기를 잡을 수 없었다. 여인들이 장난치고 웃고 떠들다 보면 군령이 먹힐 수 없게 된다. 그것을 잘 아는 손무는 왕이 총애하는 후궁들의 목을 과감히 베어 결단력을 보였다.
거참, 이 정도면 손무의 배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받아들인 오왕도 대단한 인물이다. 손무는 민주적이지만 단호한 리더십을 보였다. 합리적이고 원만함은 단호함과 함께할 때 돋보이는 법이다.
조직의 관리자는 결정할 때 단호함이 있어야 한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면 조직의 기강이 흐트러진다. 굳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다면, 나서서 적극적으로 일할 사람이 없다. 사람 좋은 상사를 만나면 사람들의 마음은 풀어진다. 세심하고 꼼꼼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느슨하게 수행한다. 조직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성품이 유순한 지도자는 웬만해서는 부하들을 심하게 닦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하들을 느슨하게 대한다. 웬만한 실수를 저질러도 크게 혼내지 않는다. 그런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것이 과연 행운일까? 평화 시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지도자 밑에서 느긋하게 생활한다. 상사와 부하가 격의 없이 지낸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그런 분위기다.
문제는 위기 상황에서 발생한다. 상사나 지도자의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조직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다. 평소 잘 대해준 부하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빠져나간다. 심지어 상사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몰랐노라고 발뺌하기도 한다. 이미 사고가 터진 다음에는 어떤 해결책도 소용없다. 관리자의 지도력 부족으로 총체적 난국에 빠진다.
조직관리에서 민주적이고 유순한 리더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대중적 인기에 집중하고, 그들의 요구에 무조건 부응하는 속성을 지녔다.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이자 사상가인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일찌감치 말한 내용이다. 확실하게 중심을 잡고 이끌어 가는 높은 수준의 리더십이 동반돼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점에서는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랠프 월도 에머슨(1803~1882)의 다음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그대의 선량함에는 반드시 '가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선량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사람과 유능한 사람은 다르다. 가시가 없는 선량함은 무능함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욱하는 나쁜 상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는 물렁물렁한 지도자가 되면 기강이 서지 않는다. 부하의 잘못을 단호하게 질책하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자기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조직을 혼란에 빠트리는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손무는 오나라 왕 합려가 부여한 일시적 권리를 제대로 행사했다. 손무는 단호함과 결단력을 보임으로써 다루기 힘든 180명의 후궁을 완벽하게 조련했다. 읍참후궁이 주는 지혜는 법은 예외 없이 엄격하게 집행될 때 법의 위엄이 선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권위도 맺고 끊음이 분명할 때 제자리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