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자국(Le Premier Pas)
‘그녀가 내게 먼저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내게로 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으니까요.’
프랑스의 유명 프로듀서이자 가수인 클로드 미셀 쇤베르그(Claude-Michel Schönberg)가 부른 ‘첫 발자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 사랑을 느끼는 남자의 설렘과 떨림, 그녀가 거절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담겼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기타리스트 클로드 치아리(Claude Ciari)가 발표한 기타 연주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뭔가 처음 할 때면 늘 ‘첫 발자국’이 생각난다. 새하얀 눈밭을 처음 걸어갈 때의 기분이랄까. 깨끗하고 신선하면서도 설레는 그런 기분이 떠오른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처음과 만난다. 첫사랑, 첫 만남, 첫 키스, 첫 등교, 첫 배움 등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다. 처음의 떨림으로 세상을 산다면 권태롭지 않을 것이다.
처음 물감을 받던 날도 그랬다. 살짝 떨리고 설렜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순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의 느낌을 읽어보니 낯이 간지럽고 민망하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랬다. 일기장을 들추어 옛이야기를 읽을 때 손발이 오그라든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차마 쑥스러워 남에게 들여주지 않고 추억으로 묻으려다 써본다.
처음으로 물감을 칠한다.
그림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수채화 물감을 받았다. 처음으로 수채화 그리기를 시작했다. 첫날은 색깔을 만들고 칠하는 연습을 한다. 오호 하얀 종이에 입히는 색깔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려한 색들이 도화지 위에서 잔치를 벌인다. 물감을 묽게 풀어 붓질하는 연습도 한다. 물감을 팔레트에 짜놓고 필요한 양만큼 물에 섞어 칠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지만, 지금 생각하면 물감을 칠하기에 조금 이른 감이 있다. 그래도 그때는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에 우쭐했다. 초보자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집중을 요구한다. 붓질, 색깔, 스케치, 물감 칠하기 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처음 하는 일은 손에 익지 않아 서툴다. 연습만이 능숙한 손놀림을 만든다.
물감과 팔레트, 스케치북을 몇 개 더 장만했다. 집이든 화실이든 틈만 나면 연습해야겠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하고, 뭔가 될 것 같다는 상상에 빠진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마다 느끼지만, 계획은 거창하다. 아쉽게도 결심은 달콤하지만, 실천이 빈약한 게 흠이다.
사물을 그릴 때 먼저 모양을 잘 표현해야 한다. 다음에는 색을 잘 사용해야 그나마 봐줄 만한 그림이 된다. 물감으로 사물의 색감과 질감, 입체감을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색깔의 농도 조절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기이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영 어색하다.
그래도 스케치는 한결 부드럽다는 착각에 빠졌다. 연필 쓰는 것이 편하고, 선 긋는 것도 제법 모양이 난다. 연필로 사물의 명암 넣기도 한결 자연스럽다.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옷감의 미세한 잔주름을 넣는 것이다. 앞으로 이 부분을 집중 연마하겠다고 다짐한다.
기본 스케치를 마치고 물감을 칠한다. 서로 다른 물감을 섞어 색을 만들고, 색으로 밝음과 어둠을 구분하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연하게 시작한 후 덧칠하면서 채도를 올린다. 시작할 때 색을 충분히 만들어 둬야 한다. 중간에 색을 다시 만들면 같은 색이 나오기 힘들다. 수채화는 맑은 느낌이 중요하기 때문에 색 조절을 잘해야 한다.
지금 생각하니 헛웃음이 난다. 한 발 한 발 겨우 걸음을 떼는 아이와 같다. 그때는 그걸 대견하게 여겼다. 남들이 보면 걸음마를 뗀 것도 아니면서 꽤 잘난 체하는 걸로 보이겠다. 누구나 처음이 있었고, 갓 시작한 시절이 있었다. 남들이 보면 유치하지만, 그런 민낯을 스스로 내보이는 것도 그리 큰 흠은 아닐 것이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