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풍경화

by Henry
비오는 거리.jpg


그리스인 조르바가 아닌 나는

여전히 자유인이 되지 못한 채

서둘러 몇 군데를 방문하고

정리한 자료를 전달하고

도시의 이 끝과 저 끝을

횡단하느라 분주한 하루


간밤 쉬 잠들지 못하고

자다 깨다 잠을 설친 탓에

운전대를 잡은 채

몇 번의 깊은 하품

신호등 앞의 짧은 졸음으로

뒤차의 채근을 받고

화들짝 놀라 차를 몰았어.


낮게 드리운 잿빛 구름

잔뜩 찌푸린 민낯의 하늘

꽉 막힌 도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차들

차창으로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그 모습을 보면서도 느긋한 마음

느림의 미학을 아는 걸까


가을날

줄어드는 햇빛 따라

송과선(松果線)의 멜라토닌은 늘어나고

덕분에 몸은 처지고

낮은 짧고 길어지는 밤에

센티 해지는 기분


서늘한 바람은

서서히 한해를 끝으로 내몰고

성찰하는 사람들 속에서

멜랑꼴리한 마음을 즐기니

떠남의 미학을 아는 걸까


도시는 회색의 침묵에 빠지고

거리에 내리는 비 탓일까

흔적 드문 사람들의 발길

노란 우산을 쓴 여자아이는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단지 속으로 사라지고

비를 따라 가을이 조용히 내려와


비 오는 날이면 들려오는 노랫말처럼

깨끗한 붓 하나를

아니 온갖 붓을 챙겨 나와

거리를 천연색으로 색칠하고 싶어


언젠가 나는

시간에 발목 잡히지 않고

바람에 밀리지 않고

자유인이 되어

헐헐 날아다닐 거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딘 편안함보다 낯선 설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