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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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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 여행자 Nov 25. 2024

요리의 고수

끝나지 않은 흑백요리사 이야기

 지금이다. 한강공원을 산책하고서 바로 씻지 않고 소파에 드러누운 아들을 일으킬 방법은.

 "기쁨아, 집에서 호떡 만들까? 짜잔. 여기 호떡 만들기 재료가 있거든."

 성급히 부엌 수납장에서 호떡 믹스 밀키트를 꺼냈다. 봄에 사다 두고서 여태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호떡 믹스 밀키트. 이제 유통기한이 4일밖에 남지 않았다. 어떻게든 오늘 해결 봐야 하는 재료. 기쁨이는 요리,라는 말에 벌떡 몸을 일으킨다.

 "기쁨이 엄마랑 같이 만들자. 좋지? 그러면 얼른 샤워하고 와. 특히 손 깨끗이 씻고. 기쁨이가 먼저 씻고 책 읽고 있으면 엄마 씻고 와서 같이 만들자."

 "그러면 엄마가 재료 준비하고 있어요, 저 금방 씻고 올게요."

 기쁨이가 소파에서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통했다. 씻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기쁨이를, 요리로 꾀어냈다. 이제 씻기 싫어했던 마음은 훌훌 벗어던지고, 수도세가 급상승하도록 노래를 부르며 샤워하기에 빠져들 것이다. 다행이다.


 요리를 잘하는 친정 엄마 덕분인지, 그다지 요리에 관심 없다. 결혼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불행히도 망상이었다. 간간히 조금씩 새로운 요리를 도전해 보거나. 이때에는 백종원 선생님이 많은 도움을 주신다. 유튜브나 블로그에 나오는 많은 요리법을 참고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반찬가게를 이용하거나 컬리에서 나오는 밀키트를 종종 이용한다.

 그렇게 손맛이 없는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기쁨이는 요리에 관심이 많다. 저녁을 준비하려고 재료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으면

 "엄마, 오늘 저녁은 뭐예요?"

 "제가 고기 구울까요?"

 "제가 쌀 씻을까요?"

 뭐든지 쉽게 할 것 마냥 자기가 하겠단다. 아. 키도 작아서 싱크대에 손이 겨우 닿으면서 무엇을 하겠다고. 마냥 기특하게 여기고는 어, 그냥 얼버무린다. 그럴 때에 프라이팬에 가지런히 구워지는 고기를 집게로 몇 번 뒤집거나. 밥통에다가 쌀컵으로 쌀을 옮겨 담거나. 여러 요리 과정 중에 한 가지만 하더라도 금방 흡족해하면서,

 "엄마, 내가 고기 구웠어요."

 "엄마, 내가 밥 지었어요."

 하며 내심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자랑한다. 아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뿌듯함이란. 자랑 뿜뿜. 그거 하나 가지고 뭐 하나 싶으면서도. 그래, 네가 족하면 나도 족하다. 네가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에 기쁨이와 부엌에서 호떡 만들기를 시작한다.

 먼저 그릇에 45도의 미지근한 물을(정수기 이용) 180ml 받아 놓는다. 기쁨이가 이스트가 담긴 비닐을 까서 그릇에 쏟아붓는다. 붓는 과정에서도 이미 반 이상은 그릇 밖으로 쏟아진 듯하다. 아. 기쁨이가 슬며시 나를 쳐다본다. 괜찮아. 나무 주걱을 아들에게 내밀자 아들이 젓는다.

 "이 가루가 물에 다 녹을 때까지 잘 저어야 돼. 살살살살."

 "살살살살."

 다소 과격한 아들의 주걱질에 물이 찰랑찰랑 거리며 금세 그릇에 넘쳐날 것 같지만. 그릇에 담긴 물이 내 마음을 아는지 다소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이스트를 녹이고 있다.

 "자, 이제 믹스 가루를 부을게. 잘 섞어봐."

 믹스 가루 봉지를 뜯어 그릇에 붓는 동안 기쁨이가 밀키트 박스 뒷면의 설명글을 읽는다.

 "주걱으로 부드럽게 5-10분간 반죽합니다. 헤에. 5-10분간 반죽하래요, 엄마."

 아들은 그릇에 가득 담긴 반죽 가루를 바라보며 언제 다 저어,라는 표정으로 주걱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이미 반죽 가루가 조금씩 그릇 주위에 떨어져 가지만 끝내 못 본척하리라 다짐한다. 잔소리가 되는 순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기 십상.

 "엄마, 반죽이 제일 중요하군요. 벌써 힘들어요."

 아들이 싱크대 위로 한껏 올린 어깨와 팔이 힘든지. 힘껏 주걱을 잡은 손이 아픈지. 힘들다는 말을 하지만 주걱을 놓지는 않는다. 짐짓 모른 척.

 "당연하지. 열심히 잘 섞어. 반죽이 제일 중요해. 아까 그릇에 넣은 물, 이스트 그리고 믹스 가루가 잘 섞여야 돼."

 그 말에 아들은 더욱 어깨를 앞으로 내밀며 열렬히 집중 모드.


 큰 아들이 캐치볼을 끝내고 들어왔다. 부엌에 오더니 동생과 엄마가 무언가 열심히 만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분명 본인도 하고 싶으리라.

 "사랑아, 너도 같이 할래?"

 라고 넌지시 물어봤지만 아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일 텐데. 어제 마트에서 사 온 캐슈너트가 생각났다. 분명 사랑이가 먹고 싶다고 장 볼 때 직접 고른 품목이다. 그래, 그걸 부탁해 보자.

 "사랑아, 여기 설탕이 있는데, 땅콩이 별로 없네. 여기 네가 좋아하는 캐슈너트 넣으면 맛있을 것 같아. 캐슈너트 손으로 잘게 부숴서 넣어줄래."

 슬며시 설탕그릇을 내밀었다.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소매를 걷고 수납장에서 캐슈너트를 꺼낸다. 캐슈너트를 하나씩 꺼내서는 손으로 잘게 으깨어 설탕 그릇에 넣는다. 좋아하는 캐슈너트를 호떡에 넣는다 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보조개가 한껏 드러난. 기분이 좋다는 뜻. 다행이다.


▲  출처 : 네이버.  서면의 씨앗 호떡


 "우와. 이 호떡 씨앗호떡 되겠다. 부산에 가면 씨앗호떡이 있어. 서면 롯데 백화점 뒤편에. 우리 부산 갈 때 묵었던 호텔 있잖아. 거기가 서면이거든. 거기 유명한 씨앗호떡이 있어. 이렇게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호떡인데. 엄마가 처음 먹으러 갔을 때. 호떡 하나에 500원 했었어. 큰 철판에 기름을 엄청 많이 넣어서 그 호떡을 튀기는 거야. 아. 맞아. 우리 그때 2년 전에 가을에 부산 놀러 갔을 때 씨앗호떡 먹어봤잖아. 기억 안 나?"

 아이들은 기억이 말 듯 부산 서면의 씨앗 호떡을 떠올리고는 각자 본인의 일에 집중한다. 추억에 기분이 들뜬 것은 엄마뿐이다. 

 "그때 엄마 대학생 때 엄청 비싼 호떡이었는데. 사람들도 엄청 줄 서고. 추운 날 가서 먹었었는데."

 라고 말을 흐리자, 거실에 있던 남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그렇지. 그 추억은 나만의 추억이다.


 사실 붕어빵 보다 좋아하는 것은 호떡이다. 호떡의 달콤한 설탕과 그 안에 씹히는 견과류가 좋았달까. 녹차 호떡도 좋다. 약간의 씁쓸함의 맛이 담긴 녹차 호떡. 넓은 철판에 기름을 가득 뿌리고는, 큰 파란 통의 비닐에 가득 담긴 반죽을 손으로 조금씩 떼어 둥글게 만들고는 설탕을 넣고. 철판에 호떡 뒤집개로 지그시 누르는. 아. 생각만 해도 호떡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동문시장의 입구에 유명한 호떡 할머니가 계신데. 지금도 계시겠지요. 동문시장 첫 번째 호떡 가게예요, 오래된 맛집은.


 호떡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었나. 그저 설탕 호떡. 녹차 호떡만 알았건만 부산에 가서 씨앗 호떡을 처음 접했고. 서울에 이사 와서는 야채 호떡을 처음 접했다. 30분 줄을 서서 얻어낸 남대문 야채 호떡. 외국인들도 줄 서서 먹는 호떡이라 했다. 웨이팅을 견딜 만큼 호떡의 크기도 컸을뿐더러 고로케마냥 호떡 속의 다양한 재료들은 입맛을 돋웠다. 하나는 순삭이다. 줄 선 만큼 더 구입하지 않은 것이 후회될 뿐. 또 먹으러 가야 할까나.




 추억에 젖어있을 때. 아이들은 이미 반죽과 캐슈너트 부수기를 마친 상태다.

 "우리 마치 흑백 요리사 된 것 같아."

 "엄마, 우리 잘했죠?"

 "엄마, 우리 흑백 요리사 보면 안 돼요? 넷플릭스 없어도 유튜브에 검색하면 볼 수 있대요. 우리 봐요."

 다시 시작된 흑백 요리사 이야기에 하하하. 크게 웃는다.

 "그럼 아빠가 심사를 봐야겠네."

 라고 남편이 너스레를 떨자, 아이들은

 "눈 가려야 돼. 검은색 안대 껴서 심사해야지."

 라고 응수한다. 아이고. 언제 끝나나, 흑백요리사. 아차. 시즌 2 한다 그랬지.


▲  (좌) 제각각 모양의 호떡 반죽 (우) 후라이팬에 곱게 구워드릴게요  ⓒ moonlight_traveler


 반죽을 마치고는 손에 식용유를 바르고 반죽을 떼서 얇게 펴준다. 그리고 캐슈너트를 잔뜩 넣은 흑설탕 재료를, 티스푼으로 한 스푼 가득 떠서 넣고는 손으로 동그랗게 오므려준다. 손이 작은 기쁨이는 이미 설탕이 넘치고도 넘친다. 이 모습을 본 사랑이가 이게 뭐야,라고 비웃는다. 괜찮아 조금씩 하면 돼. 처음부터 잘하는 게 어디 있어.

 흥미를 붙인 기쁨이는 호떡을 네모 모양, 움푹 속이 파인 모양, 기다란 모양. 이러면서 각양각색의 호떡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래, 너답다. 뭐 하나 똑같기를 거부하는 너처럼. 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호떡도 휘황찬란하구나. 모양이 달라도 프라이팬에서 주걱으로 눌리면 엇비슷한 모양. 흑설탕과 캐슈너트가 들어간 달콤하고 고소한 맛은 똑같지. 그래. 너는 지금. 조금은 유별나도 어차피 조금씩 비슷하게 혹은 똑같이 커가는 과정일 거라고. 초조해지지 말자고. 엄마는 그렇게 바라보기로 한다.


 이제 굽기만 하면 돼. 오일을 프라이팬에 두르고는 반죽을 하나씩 올려둔다. 뒤집개로 지그시 누르자 호떡이 얇게 펴진다. 저도 해볼게요, 가만히 지켜보던 기쁨이가 주걱을 들었다. 까치발을 하고서 호떡 반죽을 하나씩 주걱으로 눌러본다. 와, 신기하다. 호떡을 뒤집개로 뒤집어도 보고.

 "엄마, 맛있을 것 같아요. 빨리 먹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완성이 됐다.

 우리만의 씨앗호떡. 우리 집에서 찍은 흑백요리사.

 "한 번 먹어볼까."

 모두 포크 하나씩 들고 아일랜드 식탁에 둥그렇게 서서는 호떡을 집어 본다. 약간은 탄듯한 거뭇거뭇한 호떡. 속이 터져버려 설탕이 흐르는 호떡. 립파이처럼 기다란 호떡. 서로 다른 맵시를 뽐내고 있다. 입에 넣어보니 설탕의 달콤함과 견과류, 특히 큰아들이 부셔서 넣은 캐슈너트의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지며 오도독 씹힌다.

 "와, 맛있어요. 엄마. 제가 요리했어요. 저 잘했죠?"

 늘 칭찬이 고픈 기쁨이가 배를 내밀며 눈을 반짝거린다.

 "그래 최고야. 기쁨이가 요리했네. 역시 요리박사! 어쩜 이렇게 섬세하게 호떡을 잘 만들까. 끝까지 인내하면서 만들어서 이렇게 맛있게 완성이 됐네. 형이 캐슈너트를 넣어서 고소해."

 "전 요리의 고수예요. 이 맛은 꿀맛!"

(파뿌리,라는 책에서 나온 말이란다. 밥을 먹다가도 꼭 일어서서는 양팔을 뻗어 밑에서부터 위로 대각선으로 치켜들어 올리며 외치는 말.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산책 후 아들을 목욕하게끔 하기 위해 시작된 요리. 유통기한이 4일밖에 남지 않아 오늘 해치워야 하는 호떡 믹스 밀키트. 이렇게 시작된 요리가 각자 흑백요리사가 되길 자처하며 결국 꿀맛,으로 마무리.

 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빨갛게 하늘을 태우고 있으며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다. 이제 우리 EBS 세계테마기행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자꾸나. 내일은 월요일이잖니.

 그렇게 흑백요리사 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요리의 고수는 기쁘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특별한 것 없는 음식이 평생 기억에 남는 이유가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어떤 음식은 손으로 만드는 위로 같다. 

재료를 구하고 씻고 다듬고 만들어 전하는 수고로움과 누군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한데 섞인 맛깔스러운 위로.


고수리 저. 『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 』





덧. 밀키트가 요리냐고 물으신다면 그래요, 단순히 굽고 볶고 끓이는 요리 초보자한테는. 이것도 수고스러움과 사랑의 마음이 가득한 맛깔스러운 요리라고 자부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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