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국의 [행복의 기원: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를 읽고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올 때마다 고민하게 되는 내용이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성찰의 시간. 답은 없지만 끊임없이 결국 이 질문으로 모든 생각이 귀결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학생 때에도 한창 진로 고민을 하던 시점에, 이 고민 때문에 철학책을 엄청 보던 때가 있었다.
결국 내 삶에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선택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엔 나름의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음에도, 인생은 끝없이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다시 돌고 돌아, 다시 이걸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 왔다.
근본적으로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할까? 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던 찰나였기 때문에,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지나칠 수 없었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행복에 대해 살펴본다.
철학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생각했을 때, 좋은 삶(good life)과 행복한 삶(happy life)은 별개이다. 인간은 행복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철저히 진화의 관점(생존과 유전자 번식)에서 행복한 것이다. 때문에 철학적 관점이 아닌, 진화적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행복'을 파헤쳐볼 수 있다.
개인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유전적 요소가 50% 이상을 좌우하며, 나머지 요소도 결국 성격적인 측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더 행복해지려는 노력은 키가 더 커지길 바라는 노력 만큼이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ᐟ 누군가에겐 허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애써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느껴져 오히려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낙관적인 편이라서 사실 이미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성격적인 측면 중에서도 외향성이 개인의 행복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데, 이 성격적 특성 중 사회적인 측면이 행복과 크게 연관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회성’이 개인의 생존에 크게 영향을 끼쳤기에, 진화적으로 이와 관련된 특성이 쾌락을 제공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관계’가 아닌 ‘자본’ 역시 생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나, 아직 진화적으로는 자본에 반응하도록 발전하지 않았기에, 돈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자본을 가지고 있을 수록 스스로도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외면하여 도리어 행복에는 역행하기도 한다. 이 부분도 흥미로웠다. 아직은 진화가 덜 되었지만, 자본이 아주아주 먼 미래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끼친다면 언젠가 정말 돈이 많을수록 행복해질 수도 있겠구나.
또한 인간은 ‘적응’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그 어떠한 성취(물질적 습득, 사회적 지위 상승)에도 금세 둔해진다. 결국 행복이란 그 강도보다도 빈번한 정도가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결론: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맛있는 식사가 곧 행복이다.
‘먹는 행위’와 ‘관계’라는 욕구를 채움으로써 우리의 원시적인 뇌는 가장 흥분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습이 가득 채워져 있는 인생인지 여부에 따라 개인의 행복이 달라질 수 있다.
친한 친구 중에 ‘인생 별거 없다. 이게 행복이다~’ 하는 얘기를 정말 자주 하는 친구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얕은 수준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곤 했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가닿을 수 있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까? 그러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나는 잘 살다 간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서 그런지는 몰라도, 더 고귀하고 의미 있는 수준의 행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게 더 옳다고 생각했다. (좋은 삶과 행복한 삶을 헷갈린 예시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명확한 구분은 차치하더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내가 정말 인생의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도 한 걸음 뒤에 서서 바라보면, 맹목적이고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주변 이들을 보면서도, 과연 그들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인지하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거창한 이론적 설명 없이도,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상태로 살아가는 그 친구를 보면서 오히려 단순하게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그것이 현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온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저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일상에서의 사소한 순간들을 음미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행복 유전자를 타고 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인생의 외적 조건은 개인의 행복을 10% 밖에 예측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10%를 위해 인생의 시간과 에너지의 90%를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아야겠다.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이 되자.
+) 행복에 영향을 끼친다는 ‘관계’ 측면에서, 오히려 그 네트워크의 크기를 지나치게 크게 보는 것도 피곤함을 가중시킬 수 있겠다(J). 어쩌면 내 주변의 가족과 친한 친구 몇몇과 살아가는 사회에서만도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바운더리를 과하게 크게 봐서 더 인정 받길 원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