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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들로 May 22. 2018

<설국열차>에 탔다

혼영일년 3月 : 혼자서 바라보는 세상 1

<설국열차>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얼어붙은 지구를 끝없이 달리는 기차는 가진 부에 따라 칸이 나뉜다. 돈 없는 이는 꼬리칸, 부를 가진 이는 앞칸, 그리고 맨 앞인 엔진칸에는 열차의 주인 윌포드(애드 해리스)가 산다.

  

꼬리칸에 살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열차를 해방시키기 위해 폭동을 일으킨다. 열차 엔지니어 남궁민수(송강호)와 그의 딸 요나(고아성)의 도움으로 차례차례 설국열차 앞으로 나아가고 결국 윌포드가 있는 엔진칸에 다다른다. 그런데 윌포드에게 설국열차의 충격적 진실을 알게 된 커티스는 원래 목표였던 열차 해방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봉준호 감독 팬이었던 나는 <설국열차>를 매우 재밌게 봤다. 나름 영화광이라고 자부하면서 열차칸에 대한 상징, 계급 구조와 구성원의 관계 등 여러 생각거리를 해석하며 잘난 척했던 것 같다.  



영화를 본 얼마 뒤 수원역에서 무궁화호를 탈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열차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선로 전기 공급 고장으로 다른 열차에서 환승한 승객까지 실은 열차는 정원을 넉넉히 넘기고 있었다. 세 시간이나 연착됐다며 흥분한 승객들의 분노가 객실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설국열차 꼬리칸 실사판이 있다면 바로 이 곳이겠구나, 그래도 나는 질서를 지키며 지성인으로서 침착을 유지했다.  


그런데 곧이어 열차가 영등포역과 서울역에 정차 예정이란 안내방송이 나오자, 다른 열차 승객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발을 굴렀다. 용산역에 아들 내외가 마중 나왔다는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는 기관사에게 가서 용산역에 세워 달라고 얘기해보겠단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아저씨가 웃으며 얘기했다.  


“아지매요. 여가 설국열찬교. 기차 세워 달라고 세워주게.” 


그러자 아주머니는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안 될 건 뭐요. 내는 용산역 도착으로 끊었는디...  

  그라고 설국열차도 섰잖아요.” 


아주머니의 당찬 한 마디에 용산역 종착으로 보이는 다른 승객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용산역 도착을 목표로 혁명을 일으키러 엔진칸으로 떠난 아주머니와 승객들을 보면서 나는 아저씨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부선 열차는 영등포역과 서울역에만 선다. 오직 호남선만이 용산역에 선다. 

아무리 열차가 지연되어도 코레일 만의 오랜 룰이 있는데, 몇 명이서 그걸 깨뜨릴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꼬리칸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 거짓말처럼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 열차는 승객들의 요청으로 용산역에 잠시 정차 예정입니다.” 


용산역 플랫폼에 내리는 승객들을 차창 밖으로 바라봤다.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달리는 기차를 세웠던 커티스가 떠올랐다.  


혼자서 뭘 하겠냐며 무심코 그동안의 룰을 받아들이고 관성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관성 속에 내 권리는 깊숙이 잠든다.    

그래서 달리는 열차를 멈추는 것은 아주머니처럼 마땅히 누릴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개인의 당연한 행동인 것 같다. 관성을 깨고 내 권리를 쟁취하겠다는 당연한 행동 말이다.   

혼자였던 아주머니의 단순하고 당당한 행동이 혁명의 불씨가 되어 움직이는 열차를 멈췄다.  

아주머니는 분명 용산역 티켓을 가지고 있었다.   


커티스, 아니 그 40대 아주머니야말로 <설국열차>를 제대로 보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난 설국열차 승객이었다. 





#. 혼자서 기죽지 말고 당당히 나의 권리를 주장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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