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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들로 Jun 23. 2018

혼자 숲을 걷는 이유 <와일드>

혼영일년 6月 : 혼자서 숲에서 힐링하기 3

신을 독실하게 믿던 최불암이 홍수로 집에 갇혔다.

보트가 와서 구하려 했으나 최불암은 기도만 했다. 헬기가 와서 구하려 했으나 최불암은 신을 믿고 버텼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최불암이 신에게 따졌다. 그토록 기도했는데 왜 구해주지 않았냐고 묻자 신이 말했다.  

너 구하려고 보트랑 헬기 보냈는데 거절했잖아.   


<와일드>를 보면서 어렸을 때 읽었던 최불암 시리즈가 떠올랐다.

여행 목적지에 도달한 셰릴은 고통스러웠던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반복할 거라며, 어쩌면 그때 이미 구원받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사색한다.  

지독한 여행 끝에 기적이 생기지는 않는다. 야생을 걷는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숲을 홀로 걸으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셰릴이 있다.  

어쩌면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버텼던 셰릴 자신이 기적이 아닐까.



<와일드>는 26살 여성이 홀로 4,285km에 달하는 PCT(Pacific Crest Trail)를 종주하는 여행기다.

멕시코 국경에서 미국 서부를 거쳐 캐나다 국경까지 험난한 자연으로 혼자 걸어간 셰릴 스트레이드의 실제 이야기다. 셰릴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방황한다. 낯선 남자들과 외도에 빠지고 마약에도 손댄다. 이혼 후 ‘스트레이드’로 성을 바꾼 셰릴은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아메리카 대륙 종주를 시작한다.

  

숲을 홀로 걷는다는 건 인생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온전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외롭고 불편하다. 낯선 세계에 자신을 가두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독에 직면시킨다.  

피할 곳 전혀 없는 야생에서 내가 맞닥뜨리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바야흐로 나의 현재와 나의 과거가 대화하는 시간이다.   



How wild it was, to let it be.  

흘러가게 내버려둔 인생은 얼마나 야생적이었던가.  

- <와일드> 셰릴이 여행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떠올린 마지막 사색 -


셰릴은 PCT를 종주하며 과거의 파편들과 마주한다.

아버지의 학대, 엄마의 암투병, 방황했던 과거 파편들이 길을 걷는 현재에 수시로 스며든다. 셰릴은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그저 바라본다. 한때 집착했던 셰릴이 잠시 내려놓고 관조한 인생은 야생적이다. 아버지의 학대, 엄마의 죽음도 셰릴이 어쩔 수 없는 인생의 소용돌이다. 화나고 슬프겠지만 셰릴은 후회 않는다. 한때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삶 또한 나 자신이니까. 숱한 고난을 버티면서 묵묵히 걸을 뿐이다.

마침내 캐나다 국경에 다다른다. 어느덧 목적지다.

 

4,285km 종주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후회스러웠던 과거가 현재를 집어삼키더라도 묵묵히 걸어가는 게 인생이다.  

길을 가다가 사고도 치고 길 좀 잃으면 어떤가. 그것도 인생이거늘.

와일드한 인생을 열심히 버티는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 기적이지 않을까.

여행 직전 셰릴이 바꾼 성 '스트레이드(strayed)'는 ‘길을 잃다’라는 의미다.




#. 기적이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잘 버티고 있는 나 자신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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