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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라이프 Jun 17. 2020

우리 사회의 CPR, 정서적 공감

공감과 사랑이 죽어가는 사회, 폭력으로 질식하는 사회


    세상에 태어나서 옹알이가 끝나고 처음 말하는 의미어, 엄마. 누군가 죽음에 직면한 순간에, 절박한 순간에 내뱉는 절규이자 마지막 외침도 바로 엄마이다. 언어학에서 보면 러시아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일어  등 모두 엄마를 "마마"라고 하듯이 엄마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다른 말과는 다른 독보적인 무엇이 있다.   이미 그 의미도 가족 중 한 사람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아닌 '사랑'이란 단어보다 더 큰 사랑을 품고 있고 맘 한가득 그리움을 담아내는 추상명사 이자 감탄사이다.

그러나, 그런 엄마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폭력과 잔인한 공포를 전달해 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더욱 슬픈 사실은 이런 유사한 일이 해마다 수위를 높여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연이어 일어나는 부모의 아동학대는 가히 엽기적이다. 11살짜리 친딸을 프라이팬으로 지져 지문을 없애고 쇠사슬을 목에 매어 베란다에 놓고 거의 굶기다시피 한 친모, 9살짜리 아들을 60cm 캐리어에 넣어 질식사시킨 의붓엄마 모두 엄마였다. 정신적인 탯줄로 지지와 사랑을 전해주어야 할 엄마들이 이미 병들대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생활이라는  울타리 때문에 범죄의 사각에서 매일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아동학대와 가정폭력, 지금도 어느 가정이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비슷한 학대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빈곤과 가정불화, 부모들이 겪는 사회적 어려움과 같은 외적 원인이 가족들에게 투사된 것이라고 하기엔 이미 이들 부모의 정신적 트라우마나 성장과정에서의 문제들이 간과된  것은 아닐까 의구심마저 든다.  점점 우리 사회도 폭력과 학대에 대한 자극의 역치가 높아지고 사회적 공감능력도 떨어지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단단히 박힌 굳은 살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나 경각심보다는 무관심을 선택하는 겁쟁이가 되도록 종용하고 있다. 아니 근본적으로는 나를 중심으로 작아진 반경 속의 세상에 안주하고 세상의 복잡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나 자신의 평온함과 자족을 추구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가 우주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태양계를 벗어난 원대한 꿈을 꾸어 보고 천문학적인 숫자의 부를 축적한다고 한들 행복감을 느끼는 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는 우리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속 자아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나의 삶이 풍요로운 들 내 주변에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매일 겪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일은 어쩜 나 자신도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목소리를 내야 하고 우리 사회의 공동선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작은 힘을 보태야 한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가혹행위들 이전에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사랑을 회복하는 일.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사회적 공감과 포용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CPR이 아닐까.


    대가족 시대처럼 부부간의 문제를 완충해 주는 동네 어른들도 있었고 부모 사랑이 부족할 땐 할머니나 삼촌들, 이웃처럼 애착형성이 가능한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세상, 아니 본질적으로는 기계문명보다는 인간적인 관계와 소통으로 삶을 채워가던 시절이 새삼 그리워진다. 원자화되어 가는 세상, 공동체의 도덕적 준거가 와해되는 사회, 나 자신만을 위한 여러 가지 선택들의 부산물이 나은 아픈 현실들 앞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법을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폭력으로 질식해 가는 이 사회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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