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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라이프 Apr 24. 2020

나도 그랬잖아.

내 꿈이 설거지에 씻겨버렸다는 젊은 엄마들을 위해

    얼마 전 소그룹 모임에서 30대의 엄마가 아이들 키우느라 경력이 단절된 자신의 모습과 남편의 사회적 성취를 비교하면서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특히, 젊은 시절 유학까지 왔을 때는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엄마로서의 삶에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 자족하며 모든 일을 다 해오던 차라 처음엔 공감이 되지 않았다.

    저렇게 이쁜 애기들 보면 얼마나 행복한데, 인생의 황금기를 살고 있는 거야~~라고 다독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옛날을 자세히 돌이켜 보니 나에게도 나의 성취가 아이들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졌던 시기가 있었다. 똥기저귀 갈고 설거지 하는 일 따위는 누구나 하는 일이니까 좀 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향해 나다운 삶을 찾기 위한 노력도 아주 중요한 한 축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큰 애를 낳고도 대학원 졸업 때까지는 상주하는 가정부를 친정엄마가 지원해 주셨다.  남편은 좀 불편해했지만 나는 주부의 일상에서 좀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농장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농장에서의 바쁜 일상 중에도 강사일은 계속했다. 근처대학교에 학과장으로 있던 선배 언니가 농사일만 하면 너무 힘드니까 가끔 기분전환 겸 강의를 오라고 강의 과목을 챙겨 주었다.  사실 과수원 일 오시는 아줌마들 점심식사와 새참으로 김밥까지 10여 줄을 싸놓고 강의를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느 날, 강의 도중에 판서를 하다가 내 손목에 덜 지워진 김치 국물 자국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참 지금 생각하면 왜 이리 아등바등했던지... 그렇게 뭐가 되고 싶었을까? 나도 그 젊은 엄마처럼 딱 그 느낌, 내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서 존재하기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농가 바로 맞은편에는 시아버님이 오래전에 건축하신 창고가 있다. 시멘트 블록에 왕겨를 넣어 지은신 재래식 저장창고였는데, 우리 가족의 서재겸 작업실, 장난감 잡동사니들이 있는 곳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남편이 달아 놓은 열감지센서가 작동했는지 딩동 딩동 소리가 났다.  나는 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 창고에 불이 난 것이다. 급히 도착한 소방관들이 전소된 창고를 끄느라 한 겨울 옷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불을 열심히 꺼주셨고 너무 감사해서 따뜻한 국이랑 밥을 대접해드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집에는 옮겨 붙지 않았지만, 모든 책과 장난감이 다 타버렸다. 컴퓨터들도 지독한 냄새를 남기고 모두 녹아내렸다. 동전까지...


  이 일이 있은 후, 참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내가 잃은 것보다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 그대로인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시간강사 일과 막연히 공부에 대해 갖고 있던 미련을 후회 없이 접을 수 있었다. 훗날 우리 아이의 일기에는 불을 보고 너무 놀라 볼을 꼬집어 봤다고 적혀있었다.

가끔씩 엄마랑 전화통화를 할 때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 정말 금방이야. 너무 아등바등 살지마. 영미야."

인생을 먼저 걸어가신 엄마의 지혜로운 조언이 귀에 박히지만, 나는 나다움의 표현을 위해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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