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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Feb 24. 2021

따뜻한 샤워가 이끈 글

차근차근 연습하기

빵을 담으며 동선을 곱씹어 본다. 일단 휴게실에서 빵과 음료를 마시고 문구에 들려서 살 걸 사야지. 뭘 사야하지. 분명 찾으면 나올 필통이지만, 새 출발 겸 하나 사지 뭐. 영어 공부 노트랑 지우개, 형광펜까지만 사면 되겠다. 빵은 언제나 눈길에서 벗어나곤 했었지만, 운동 후 단단히 탄수화물을 섭취해야 근손실이 안 올 거생각에 가장 구석 코너까지 내 발을 이끈다. 몽슈란 딸기잼 빵과 크렘베리 치즈빵을 호기롭게 담는다. 맥락 없는 피어오른 전여친 생각은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음료를 고르러 간다. 요구르트를 당연하다듯이 담고 발을 이어나가는데 눈에 띈 오투. 손으로 꾸욱 누르면 입으로 들어가는 물기둥 느낌이 재밌어 어릴 때 항상 하나씩 담곤 했던 음료수. 기어이 6개 포장을 뜯고 하나를 넣는다. 그 옆엔 립톤. 아이스티 좋지, 가격도 550원 착하니 너도 껴라. 계산이 끝난 후 바로 옆에 있는 예정된 목적지로 터덜터덜 걷는다.


벌컥벌컥. 자리에 앉자마자 립톤 반 병을 단숨에 들이켜곤 잠깐 숨을 돌린다. 휴게실 안엔 왼쪽 어깨에 노란색 견장을 찬 신병들이 어색히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내보내는 경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구석에 자리 잡은 터였다. 물리지 않은 고급스러운 단맛이 입안에 돌 때쯤에야 내 모자 짝대기 3개가 새삼스러워졌다. 비번이었기에 휴대폰을 꺼내 평소에 좋아하는 게임 유튜브를 틀곤 몽슈부터 꺼내는데, 이런 손이 말이 아니네. 바벨과 덤벨로 더러워진 손이었기에 포장지 잡으면서 조심조심 먹어야지 다짐한다. 크게 한입 베어 문 첫 빵. 생각보다는 실망스러운걸. 퍽퍽한 빵과 한입에도 고개를 내밀지 않은 딸기잼. 이런 게 뭐가 맛있다고 전 여자친구는 그렇게 빵을 좋아했었는지. 그래 뭐 빵도 갓 지은 빵이 맛있겠지, 군대 마트에서 파는 비닐 포장지 공장 빵이 뭐가 맛있겠냐. 빵에 손이 닿지 않게 비닐에 손을 잘 싸서 먹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 빵. 크리미한 식감이 2프로 부족했던 빵이었지만 버릴 수 없었기에 다 먹었다.


립톤을 넘어 오투까지 마시자 꽤나 배가 찬 느낌. 적당히 찬 건 물론, 음료수가 시원해서 차기도 찼다. 빨리 살 거 사고 따뜻한 물에 샤워해야지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문방구에 들러 적당히 영어 공부 노트를 고를려는데 눈에 띄는 수학용 노트. 한 페이지가 4개로 나눠져 있어 오답노트 시 유용히 쓸 수 있는 노트였다. 4개의 지문을 페이지당 정리해야지 다짐했던 나에겐 거부할 수 없는 구성. 오명을 받겠지만 너도 나랑 같이 가자. 표지에 떡하니 쓰인 "MATH"가 신경 쓰였지만, 여유 있으면 라벨링 해주지 뭐. 지우개와 형광펜도 마저 고르다 명품 샤프와 만년필만 모여있는 유리 상자를 발견한다. 비싼 학용품이 사치인 것은 아니지만 나에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버는 돈이 적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지우개와의 이별은 언제나 실종이었던 덤벙거림을 안고 가기엔 너무 멋스러운 친구들이기 때문. 전역할 땐 하나 정도 사가도 괜찮겠다.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미래에 미소 지으며 문방구를 나온다.


이른 아침 근무 후 자고 있는 후임이 깰까 조심조심 샤워 용품을 챙기는데, 이런. 도대체 몇 번째 이런 인지. 샤워 후 입을 속옷이 없다. 일단 자리 없는 다른 부대원 걸 빌릴까 하다, 상도덕이 아닌 거 같다. 평소에도 바디 워시 잘 안 하니깐, 그냥 한번 더 입지. 지금은 긴장한 몸을 풀어주는 게 제일 중요해. 스스로 되뇌며 수건 하나 챙겨 샤워장에 들어선다. "나른한 오루에 듣기 좋은 노래" 유튜브에 검색하니 제일 처음 뜨는 영상을 틀어놓는다. 확 뜨거워질까 조심조심하며 레버를 돌리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긴다. 그래 이거지. 따뜻과 뜨뜻 사이 어딘가. 차가웠던 음료수와 날씨에 굳어버린 몸이 풀어지고 목 뒤에 붙어있었던 것만 같은 피로가 녹아 내려간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모두를 위한 공간을 혼자 쓰며 창 밖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것. 등 뒤로 흐르는 따뜻한 물에 겨울 노천 온천을 상상해본다. 고개를 드니 반듯한 4개의 거울과 거리감 있는 나. 한쪽에서 들어오는 따스한 햇빛과 흘러나오는 음악. 영화 한 장면만 같은 장면과 한가운데 인물이 나란 사실에 '영화 같은 삶'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주인공이 멋있어야 하나란 생각에 거울 봤는데 썩 괜찮다. 운동하니 몸도 최근 조금씩 울퉁불퉁해지고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하며 턱을 잡아본다. 새삼 자존감이 많이 올라갔다 느끼며, 누군가 보고 놀릴 것 같아 몸서리를 친다. 사실 안경을 벗고 보면 몸도 내 얼굴도 만족스럽다. 흐리게 보이지 않는 부분을 내 바람으로 채우기 때문. 샤워할 땐 괜찮다 느껴놓곤 이를 닦을 땐 이게 뭐야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이상으로 채워놓은 흐릿함에 다시 속지 않는다. 호언장담은 해보지만 흐릿함 셀카 필터를 걸친 내 모습에 착각은 마음처럼 거두어지지 않는다.


배경음악도, 클로즈업 같은 촬영기법도 부재한 현실이 과연 영화 같을 수 있을까. 선택과 집중이 아닌 지루한 1초들의 향연이 과연 영화 같을 수 있을까. 영화도 분명 드라마틱한 씬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위기 연출을 위해 쓰는 무난한 씬들도 있다.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무시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영상은 맥락 없는 막장이 되어있겠지. 비록 지금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내 삶도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따져본다. 반대로 영화 같은 내 삶에 부재한 것은 단지 촬영, 편집, 배경음악 따위들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영화같이 살고 싶다면 주인공이 삶 속 1초마다 씬 넘버를 붙이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기만 되지 않을까. 씬마다 적당한 배경음악을 고르고, 표현하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에 클로즈업을 하며 살아가기만 한다면 영화랑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결국 영화 같은 삶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영화로 만들어진 삶만 있을 뿐이지. 괜히 우쭐해지며 생각을 마치곤, 기분 좋았던 하루를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컴퓨터에 앉는다. 오늘은 조금 길어지더라도 차근차근 묘사해야지 다짐하며 천천히 자판을 눌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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