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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Dec 30. 2020

더 친해졌어야 했는데

내 안의 이중성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잡지 못해 아쉬운 사람들이 참 많다. 예전에는 분명 친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인스타그램 피드와 스토리를 하나하나 넘기며, 나와는 멀어진 채로 즐겁게 사는 그들을 보면, 배신감 한 방울 섞인 외로움에 예전보다 멀어진 그들과 나 사이를 확인하게 된다. 분명 가까웠던 순간이 있었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적어도 20대까지는 서로 안부를 물으며 아무리 바빠도 1년에 2~3번은 만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소중한 시간 그저 흘려보낸 것도 아닌, 내 열과 성을 다해 꾹꾹 눌러가며 행복했던 적이 있었다. 별자리 이야기처럼, '멀어진'이 아닌 애초부터 '멀었던' 사람들을 향한 나의 일방적 착각이었을까라는 의심도 잠깐 있었지만, 그건 3류 일본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결론인 것 같아 선을 그었다. 선 안에서 나는 멀어진 그들을 바라보며 가까웠던 순간들을 곱씹는다.


안일한 생각은 사실 희망과 불안함 범벅이었던 것 같다. 허블의 법칙처럼 이제는 더욱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이들을 보며,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이 즐거운 시간과 행복함이 오래가지는 않아도 되니, 다시 느끼고 싶을 때 언제든 느낄 수 있었으면 하고 희망했었다. 남들은 하나둘씩 '베스트 프렌드'를 만들어가며, 인간관계를 적어 내려가는 것을 보며, 나는 언제쯤 내 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 불안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또 멀어져 버린 사람들을 보며 '역시 그럴 줄 알았다'라며 자조하고 털썩 주저앉아 글을 쓰고 있다.


그럴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럴 줄 알고야 말고. 대학 생활하며 인싸라는 소리를 들으며, 처음 보는 사람들도 쉽게 친해지는 사교성을 가졌던 내가 '베스트 프렌드'가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참 이중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랑 친해지려 하지만, 상처를 받는 게 두려워 친해지는 와중에도 선을 긋는다. 나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잘 받는다. 조금 더 말하자면, 받은 상처가 잘 안 지워지는 편이다. 누군가와 싸우거나 언쟁이 있으면, 그 장면을 머릿속 영화관에서 계속 틀어놓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가 잘못한 거야.'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틀어놨기에 사과를 받기 전까지 영화는 계속된다. 반복되는 영화에도 이어지지 않는 사과에 조금조금씩 내 잘못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신 차려보면, 상황 속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스스로 키워버린 내 잘못에 당당해지지도 못하고 쓸쓸히 영화만 계속 보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영화는

내가 여기까지 잘못한 건 인정하고 미안해.
그치만 너가 사과하고 나에게 미안해했으면 좋겠어.

라는 속마음이 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 속에서, 내가 상처를 받아도 상대방은 합리적인 행동을 했고, 잘못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건강하지 못한 마음만이 길러졌다. '상대가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라는 결론이 사과받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했다니, 참 웃긴 일이다.


상처 받기 싫다는 두려움에도 중고등학교 친구들끼리 서로 선을 넘는 장난을 치는 걸 보면서 부러움을 느꼈었다. 나도 저렇게 격 없는 사람이 있었으면. 선을 넘는 장난을 쳐도 내가 기분 나빠하지 않아 하며 그 반대도 성립하는 사람. 기분 나빠도 미안하다는 말에 다 풀릴 만큼 친한 사람. 충분한 친밀감 아래 잠깐 선을 모래로 덮어둘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가진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선을 그으면서도 그 선에 구애받지 않았으면 하는 어리광 같은 나의 바람을 만족해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에 더불어서 나는 내 사람을 잘 못 챙긴다. 예를 들자면 먼저 같이 놀자는 말을 잘 못한다. 혹시 둘이 만났다가 어색해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에 정말 친한 사람이어도 2~3인의 소수 멤버로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임이 적어도 4명 이상이어야 편한 마음으로 약속에 나갈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친해질 때 선을 확실히 긋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내 발 앞에 있는 선이 전체의 98%이다. 아마도 그건, 상처를 받아도 남에게 탓을 돌리지 못하는 소심한 나의 면모 때문일 것이다.


'나 혼자 설레발치면서 기대다가 넘어지지 말자.'라는 생각을 언제나 은연중에 가지기에 나를 향해 반갑게 다가오는 이들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못하나 보다. 그러면서도 끝내 나의 두꺼운 마음의 벽을 뚫어주지 못한 이들을 보며 괜히 서운해한다.  스스로 방문을 잠그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면서, 혼자만 남아있는 방을 보며 괜히 자물쇠를 만져볼 뿐이다. '조금만 더 노력해보지.'라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혼잣말만 늘어놓다가는 이내 이중적이고 가식인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의 잘못을 곱씹고 내 사람은 내가 더 잘 챙겨야지라는 다짐을 해보지만, 두려움과 어색함에 선뜻 손이 나가질 않는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친한 사람들이 있다. 베스트 프렌드라고 말할 만한 사람도 몇 있고, 울적하고 서운한 마음에 SNS에 징징대자 따뜻한 위로를 건넨 고마운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 씻을 수 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은 무엇일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그 이상을 바라는 것뿐일까.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인간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친한 사람과는 더 친하게, 안 친한 사람과는 친해지고 싶어 하는 나의 어리광일 뿐일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사람들과 더 친해지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과 그에서 파생되는 무기력함 때문이다. 노력하여 친한 사람들은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는 자신을 아쉬워하며,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 떠나갈 것이라는 슬픈 확신 앞에 불안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어느 순간 너무 멀어져 버린 중고등학교 때 인연들, 대학 친구들을 보며 그들을 잡지 못했다는 후회와 앞으로도 이와 다를 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참 합리적이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아린 지금. 이제부터라도 잘하면 되는 다짐을 애써 해 보지만 잘할 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 역시 마음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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