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day Dec 08. 2023

타의적 칩거

주홍글씨

오늘도 기어이 눈이 떠진다

아직 아침이 오기도 전인 어슬퍼런 새벽이지만 나는 또 눈을 뜨고야 말았다. 내가 어제 그렇게 내일 아침엔 눈 뜨지 않게 해달라고 온갖 신에게 부탁했지만 이런 추악한 소원따위 들어줄리 없다. 나의 오늘이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면 제발 나의 이 개같은 내일따위 모조리 내어주마. 더 나은 내일따윈 없는 반복되는 삶이 지겨웠다. 하지만 절망을 더 깊숙히 숨기고 아무런 일도 없는 척 아이를 위해 방긋 웃어주며 등원을 시키고 회사 출근하기 싫다는 남편에게 힘내라는 응원도 보내며 산 자의 생기를 제법 흉내냈다.


마치 생일에 한껏 신난 어린 아이의 서툰 입김에도 힘없이 꺼트러져버리리고 마는 생일촛불처럼. 대략 살아온 내 삶은 그랬다. 나 스스로는 점점 닳아져가는데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 나를 태웠다. 엄마아빠의 자랑스러운 공부 잘하는 딸. 회사에서 시킨 일을 해내고 승진하는 과장. 누군가의 멋지고 예쁜 엄마. 그럴듯한 와이프 역할. 제법 할 만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침몰하고 있었다. 점점 깊게 잠수하며 시커먼 수심을 헤메고 있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알게 된 사실인데 제주 해녀들에게 중요한 덕목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다에 잠수 할 때 욕심내지 말고 오늘 하루도 딱 허락된 나의 숨만큼 있다 오는 것.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들면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고를 것.


나의 하루는 어쩌면 길고 지루했고 어떤 날은 기억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증세의 심각성과 우울증을 자각하고 찾은 병원에서는 기분을 조절하는 약과 진정제를 처방해주었지만 침식하던 나에게 허락된 숨이 얼마만큼인지도 모른 채 나를 쉼없이 각성하게 했다. 그러다 급하게 헉헉대며 겨우 떠오른 수면 위는 몽유병처럼 백화점을 돌아다니고 쇼핑 중독에 빠지게 되는 위험한 섬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표류하다가 세차게 내 뺨다구를 내려치며 불친절하게 날 깨운건 은행의 세찬 독촉과 부동산 가압류 통지서였다. 우리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대출과 돈 될만한 것을 다 끌어다 썼기에 남편도 별 방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친정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저 좀 도와주세요..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한달음에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날  평생 들을 욕은 다 먹은 것 같다.


미친년 그래 애새끼 청약통장까지 박살내가면서 결혼 패물까지 싹다 팔아치우고 그래서 남은게 뭐니. 뭐 이런게 다있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살수가 있니.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대체 문제가 뭐니. 그냥 집에서 조용히 살림하며 살면 되잖아. 이지경이 되서 대체 어떻게 살려고 그래!


실수 앞에 자비는 없었다. 욕을 가만히 처먹고 있던 나는 이내 입을 열었다.


엄마. 내가. 살기가. 싫어요... 내가 지금 살고 싶지가 않거든요.

너 우울증 그거 핑계대지마. 그냥 복에 겨운 소리야.


이해를 바라지 않았지만 다 핑계고 복에겨운 소리라니 더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 엄마말이 맞아. 우울증 환자라고 다 이렇게 사는건 아니지. 그냥 난 적당히 좋은 핑곗거리를 찾은 것 뿐이야. 그렇게 나는 신용불량자라는 주홍글씨 앞에 손가락질 받으며 자아가 산산조각이 났고 혹시나 이 주홍글씨가 들킬까 더 깊숙히 숨어들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완전히 불량인간이었다. 엄마는 내가 또 보험대출을 받아쓸까 모든 명의를 본인으로 돌려놓으셨고 남편은 카드를 모조리 압수하고 내게 생활비란 명목으로 일정기간 쓸 수 있는 잔잔바리 현금을 보내주었다. 더이상 나도 내 자신을 믿을 수 없어 체크카드도 없애버리고 완전히 현금을 쓰기로 했으나 복잡한 계산대에서 현금을 세고 있노라면 따가운 눈총이 등과 이마에 꽂혔다. 그래서 계산기를 가지고 다니고 얼마인지 정확히 계산을 해서 준비된 현금과 거스름 돈을 받을 비장한 각오를 하고 계산대 줄을 서곤 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대체 왜 현금을 써. 혹시 내가 신용불량자 도망자 신세인걸 누가 눈치챈걸까. 후다닥 집으로 숨어들었다. 누가 만나자는 약속도 두려웠다. 지금의 난 커피 한잔조차 사치니까.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슬며시 눈치없게 외로움이 찾아들었다. 텅빈 집에서 거실소파에 가만히 누워 생각했다. 지금 나에겐 눈이 멀고 귀가 먼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나에 대해 아무런 편견이 없는, 나를 평가하지 않는 그 누군가가 절실했다. 내가 과거에 뭘 했고 이젠 뭘 할건지 묻지말고 지금의 나를 나로만 봐주는 사람. 하지만 유니콘 찾을 생각따위야 집어치우고 나는 빨리 깨끗하고 선량한 시민으로 돌아가야 하리.

작가의 이전글 아이 옷을 정리하다가 한참을 울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