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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Oct 03. 2016

가톨릭의 뿌리를 찾아

바티칸시티

파리에서 밀란을 거쳐 아침 기차로 로마에 도착했다. 떼르미니 기차역은 생각보다 컸고, 예약한 호스텔로 가는 버스는 복잡했다. 떼르미니 역에서 바티칸으로 가는 버스로 관광객들이 많이 타기에 소매치기도 많다는 소문이 자자한 버스라 초긴장을 했으나 다행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테베 강을 건너 버스를 내려 숙소로 향했다. 처음에는 그 좁은 강이 테베 강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한국식으로 하면 작은 도시의 개울 정도로 너비로 강폭은 센 강, 템즈 강보 다는 좁았으나 유속은 훨씬 빠른 듯 보였다. 군데군데 유적의 일부가 강에 잠겨 있었다. 로마다운 강이었다. 숙소는 자갈돌이 깔린 뒷골목길을 안쪽에 있었다. 오래된 구 시가지 같은 느낌으로, 강한 노랑, 주황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약한 유스호스텔은 조금 독특했다. 입구로 들어가 집안의 광장 같은 곳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건물은 상당히 컸으나, 유스호스텔은 건물의 일부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후 머물게 되는 이태리의 숙소들은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바티칸시티로 향했다. 걸어서 15분, 산책할 만한 거리였다. 

바티칸시티 입구에서 베드로 성당으로 뻗은 길


로마를 여행지에 포함시킨 것은 로마가 유럽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지만, 바티칸시티 때문이기도 했다. 5살 때 가톨릭 세례를 받은 이후 가톨릭은 내 삶의 한 축을 담당해왔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성당 활동을 열심히 하던 어머니께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신 이후, 바쁘다는 핑계로 서서히 거리를 두다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아예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국에 있을 때 내적 외적 계기로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었다. 주택 협동조합에서 제공하는 집에 입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룸메이트 한 명이 폴란드 출신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와 그리고 그녀의 친구와 인연을 맺게 되어 어울려 성당 미사에  한두 번 참석했었고,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종종 나누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고, 그때 성당을 찾는 나를 발견했다. 힘이 들 때 내가 의지할 곳을 찾는 종교가 가톨릭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이후 성당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오른발이 닳은 베드로의 동상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바티칸시티는 특별한 곳이다. 교회를 세운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최고 영적 지도자인 교황이 머무는 신앙의 근원지이기에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이슬람교의 메카이고, 불교의 인도이다. 바티칸 시티의 성곽의 옆 문을 지나 성 베드로 광장에 도착했다. 거대한 기둥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둥근 광장에 섰을 때 그 규모에 놀라고, 그 많은 인파에 놀랐다. 아, 내가 정말 성 베드로 성당 앞에 와 있구나! 사전 조사는 없이 왔기 때문에 마냥 설레어 광장 주변을 둘레둘레 걸어보다가 검색대를 지나 베드로 성당에 들어갔다. 베드로 성당은 웅장했다. 사람들을 따라 가보니 오른발이 맨질맨질 닳은 동상이 하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받았다고 알려진 성 베드로였다. 베드로의 오른발이 닳아있는 것은 그 발을 만지면 다시 바티칸에 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위 과학적 합리적이라 알려진 서구 문명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미신적 요소를 각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연히 나도 그의 발을 만졌다. 


베드로 동상을 거쳐 베드로 무덤으로 향했다. 중앙의 베드로 무덤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 베드로 성당이라 불리는 이유는 베드로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바티칸 시티는 원래 가톨릭 신자들의 공동 무덤이 있는 곳으로 광장 앞의 오벨리스크는 로마의 가톨릭 탄압의 산 증인으로 그 오벨리스크에 매달려 처형당한 신자들도 있다고 한다. 가톨릭의 본부인 베드로 성당이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점은 의미 심장하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이들을 기억하는 전통은 그들에게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베드로 성당에는 베드로 무덤보다 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가 있는데, 첫날은 피에타가  거기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이후에 다시 찾아서 보았다. 피에타는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조각, 성화를 일컫는데,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유명한 만큼 실제 보았을 때 예수의 죽음과 마리아의 슬픔을 눈 앞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생생했다. 축 늘어진 예수의 모습, 슬픔이 가득 차 보이는 마리아의 표정, 평화롭게 죽은 듯한 예수의 표정 등이 매우 사실적이고, 조각이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베드로 성당에 한가운데, 베드로 무덤을 향해 따로 길을 만들어 놓고 막아두었기에, 누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냐고 물어보니 자비의 희년(Jubilee of Mercy) 행사 그룹 참가자를 위한 길이라고 하였다.  자비의 희년이란 가톨릭에서 죄인들을 용서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기간으로 교황의 선포를 통해 약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실행된다. 이 기간에는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기억하는 행사를 통해 개개인의 삶 속에서 용서와 자비의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기존의 율법을 어긴 자들에게 교회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이는 의례가 있다.  평소에는 닫혀 있던 교회의 청동문을 열어 두어, 기도를 하며 그 청동문을 지나는 이는 죄의 사함과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자비의 희년이 시작하면서 기간에 교황은 자비의 문(Door of Mercy)이라 하여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청동문을 여는데, 지정된 성지를 순례하고 자비의 문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가 있다고 한다. 교회는 각 국가, 각 지역마다 자비의 문과 순례할 성당 을지 정하는 데, 내가 보았던 그 길을 베드로 성당의 자비의 문을 지나 베드로의 무덤까지 오는 순례객들을 위한 길이었다. 


특별한 해를 위한 행사였기에 자비의 희년 사무소를 찾아가 등록을 하고 순례에 참가하기로 했다. 로마의 다섯 성당부터 하는 방법이 있고, 바티칸 시티 내부의 다섯 장소만 방문하면서 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시간 관계상 바티칸 시티에서만 하기로 했다. 바티칸시티 입구에서 베드로 성당에 이르는 직선대로 에 베드로 성당을 마주하고 섰다.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베드로 성당의 모습은 아름답고 장엄하였다. 바쁘게 지나는 차들과 사람들 속에서 순간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 들었다. 저 앞에 보이는 베드로 성당을 향해 딛는 나의 한발 한 발과 함께 내 마음도 함께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정된 장소에 멈춰 서서 한줄한줄 주어진 기도문을 읽고 묵상하며 드넓은 광장을 거쳐 베드로 성당에 들어섰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다시 찾은 베드로의 무덤은 이제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내 신앙의 토대를 이룬 선지자의 무덤으로 바뀌었다. 베드로가 없었으면 교회도 없었고, 나도그 순간 여기 있지 않았을 것이다. 신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순례를 마친 후 순례 참가 증명서를 받자 무언가 큰 일을 이룬 듯 뿌듯했다.




나는 성지순례를 다닐 만큼 신실한 신자는 아니다. 가톨릭 세례를 어릴 적에 받았지만, 오랜 기간 성당을 나가지 않았고, 그 신앙을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미국에 있을 때 다시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었지만, 주일미사 성가대에 함께하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티칸 시티에 가기를 원했었고, 자비의 희년 행사도 참여했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이 그동안의 냉담을 용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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