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종이달'을 보고
영화 ‘종이달’
2015년 미야자와 리에 주연의 영화인 ‘종이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화의 배경은 1994년으로 은행원이 고객 집에 직접 찾아가 업무를 보던 시절이다. 얼마전까지 가정주부였던 우메자와 리카(미야자와 리에 분)는 4년 차 은행원이다. 리카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다 얼마 전 계약직 사원이 됐다. 늘 돈을 만지는 일이기에 직원들은 옷차림이나 생활 수준이 바뀌지 않았는지 서로 예의 주시한다.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결제를 하려는데 돈이 모자랐다. 이미 골랐던 화장품 중 하나를 뺀 상황이었다. 더는 체면 깎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객 돈이 들어 있는 봉투에서 10만 원을 뺐다. 바로 현금 인출해서 채워 넣으면 되니까.
돈 많은 진상 고객의 집에서 그의 손자 코타(이케마츠 소스케)를 만나게 된다. 등록금 때문에 빚을 졌지만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코타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리카는 히라바야시가 은행에 맡긴 돈 2000만 원을 빼돌려 코타에게 빌려주기로 한다.
시작은 분명 선의였지만, 바른 직선이 아니었다. 리카는 할아버지가 마땅히 빌려줘야 할 돈을 자신이 대신 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어차피 예금 만기 날짜 돌아오려면 몇 년 남았으니 그때 다시 채워 넣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리카는 고객 돈에 점점 더 대담하게 손을 댄다. 치매 노인 고객을 속여 상품에 가입하게 만들고, 스스로 문서를 위조한다. 모두 조금씩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동료 행원의 말에 리카는 애써 죄책감을 지운다.
'종이달'은 계약직 은행원이 된 주부가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거액을 횡령하는 이야기로 평온한 일상에 균열이 가고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그렸다.
‘소확횡’의 의미
우리 사회에서 .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이란 단어가 한동안 회자된 적 있었다. 이 단어의 음율을 차용하여 탄생한 신조어는 ‘소확횡’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이라는 뜻의 '소확횡'이라는 단어 역시 몇 해전부터 유행처럼 돌고 있다.
회사의 유무형의 자산을 개인적으로 ‘슬쩍’하는 것을 의미하는 ‘소확횡’의 유형을 구분해 보자.
첫째, 회사물품 슬쩍 유형이다.
회사에 비치된 필기구 등 사무용품 챙기기, 아이의 숙제나 개인 용도 문서를 회사 프린터로 출력하기, 스테이플러나 프린터 용지 같은 회사 비품을 집에 가져가기 등이 있다.
둘째, 근무시간 슬쩍 유형이다.
근무시간 중 몰래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불필요하게 계속 화장실에 가거나, 흡연을 위해 자리를 자주 비우거나 하는 유형이다. 회사 전화로 근무 시간에 개인적 수다를 떨면 ‘비품 절도’인 동시에 ‘시간 절도’가 된다.
셋째, 복리제도 슬쩍 유형이다.
회사 의료비 지원제도를 악용하여 불필요한 치료를 받고 치료비에 대해 회사로부터 의료비 지원과 실손보험 보상을 함께 받아 병원을 다닐수록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사례다. 회사가 지원하는 사이트에서 물건을 저렴하게 구매해 ‘당근마켓’ 등에서 이익을 남기고 파는 유형도 있다.
마지막으로, 회사기밀 슬쩍 유형이다.
회사 기밀을 외부에 흘리는 것은 엄연한 ‘정보 절도’다.
직원이 생각하는 ‘소확횡’의 허용 범위
국내 기업정보 공유 플랫폼 잡플래닛의 2022년 6월 조사결과에 따르면 업무 시간 외 다른 일을 하는 '시간 횡령'에 대한 직원들의 의견은 사례에 따라 의견이 갈라졌다. 업무 시간에 여행 정보를 찾아보는 것에 대해서는 잠깐이니까 괜찮다(57%)는 답변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아무리 업무 시간이라고 해도 '잠깐'은 눈감아줄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잠깐'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걸까? 30분 정도 우체국이나 은행 등 개인 용무로 자리를 비우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 없다(53%)는 답변이 절반을 넘겼다. 급한 개인 용무가 있다면, 30분 내외의 업무 시간은 개인적으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반을 차지한다는 의미다.
업무 시간에 자주(한 시간에 한 번)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서는 '괜찮다'와 '안 된다'가 각각 절반인 50%를 차지했다.
회사 비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당 물품이 사무용품인 경우에는 챙겨가도 상관 없다는 답변이 많았다. 예를 들어, 회사 볼펜은 어차피 쓰라고 둔 거니 집으로 가져가도 괜찮고(60%), 회사에서 A4용지로 개인 자료를 출력하는 것도 괜찮다(78%)는 게 다수의 선택이었다.
사무용품이 아닌 생활용품에 가까운 비품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 달랐다. 간식류에 대해서는 챙겨갈 수도 있다는 답변이 53%, 회사에서 일하면서 먹으라고 둔 건데 그걸 집에 왜 챙겨가느냐는 답변이 47%였다.
물티슈의 경우에는 집에 가져가는 직원에 대해서는 안 된다(72%)는 답변이 훨씬 많았다. 간식이야 직원들 먹으라고 둔 거라지만, 물티슈 같은 생활용품은 양심상 가져가기 불편하다는 의견이었다.
사무실에서 전기를 개인적인 목적으로 마음껏 쓰는 직장인들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사무실에서 보조배터리를 3개씩 충전해가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괜찮다'는 답변을 선택한 이들이 71%에 달했다.
법적 관점의 ‘소확횡’
먼저, ‘소확횡’은 정확한 단어일까?
횡령죄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물건을 반환하지 않을 때 성립한다. 회사 비품을 관리하거나 보관하는 직원이 아닌 이상 횡령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더라도, 회사의 재물인 회사 비품을 직원이 마음대로 가져가면 ‘절도죄’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소확횡’의 정확한 명칭은 ‘소확절’이 맞겠다. 절도는 엄연한 범죄이다. 형법 제329조에 따르면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경우에는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고 규정되어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슬쩍’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면 횡령죄가 아닌 절도죄 처벌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관행화되어 있고 회사가 알면서도 문제 삼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회사가 직원을 고소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소소해도 확실하게 절도’에 해당한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공사(公私) 구분이 명확한 서양에선 이 같은 행위를 ‘직원 절도’(employee theft)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단속한다. 미국에서 직원 절도로 인한 기업들의 손실이 연간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공사 구분이 모호하고 온정주의에 취약한 우리나라의 조직분위기를 감안하면 심각성은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소확횡’ 실제 사례
이른바 '소확횡'의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커피믹스를 한 웅큼씩 훔쳐가 되판 직원을 회사에서 절도죄로 고소하여 절도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슬쩍한 커피믹스가 무려 1,840봉지, 시가로 3천4백만원 상당이었다.
물리학계 석학으로 꼽히던 서울대 교수가 해외출장비 1억8천만원을 횡령하여 직위해제된 사건도 있었다. 허위 초청 이메일로 수차례 출장을 가고, 일과 무관한 곳에 출장비를 썼다.
조금 규모가 큰 이야기도 있다. 오스템 임플란트에서 자금 담당 업무를 맡았던 직원이 빼돌린 회삿돈 총액은 2215억 원 이다. 잔액 증명서를 위조하고 회사 자금을 개인 계좌와 증권 계좌로 이체하는 등의 방식으로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
강동구청 투자유치과에서 근무했던 공무원이 공금 115억 원을 횡령해 체포된 적이 있다. 그 역시 대부분의 돈을 주식 투자에 썼고, 후임자가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제보할 때까지 1년 넘게 아무도 그가 돈을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해외 사례도 있다. 홍콩 최대 항공사인 케세이퍼시픽항공의 조사 결과 기내 승무원들이 와인잔, 샴페인, 빵, 물티슈 등 승객 서비스에 제공되는 다양한 물품을 절도한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 규모는 수백억원이 넘었다.
판례를 살펴보자.
회사로부터 지급받은 목장갑을 회사 승인 없이 회사 밖으로 반출한 근로자에게 대한 출근정지 30일의 징계처분은 징계재량권 남용이라 볼 수 없다.
(서울행정법원 2022. 7. 21. 선고 2021구합58202 판결)
업무시간 중 매일 집에 들러 3시간 넘게 개인적 용무를 본 영업직 사원에 대한 해고는 정당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23. 2. 10. 선고 2021가합541337 판결)
수습기간 중 근무시간에 수시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부하직원과 불화를 일으킨 보안반장에 대한 근로계약 해지는 정당하다.
(서울행정법원 2015. 10. 15. 선고 2015구합5832 판결)
근로자가 3개월간 59회의 무단외출과 7일간의 지각을 하고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경우에는 징계해고사유가 된다.
(대법원 1996. 9. 20. 선고 95누 15742 판결)
‘소확횡’의 확산 이유
'소확횡'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도 직원들이 회사 안에서의 불만족을 소소한 방식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해석이 많다. 관련 내용을 연구한 논문 ('개인적, 조직적 및 환경적 요인이 직원 절도에 미치는 영향 연구’, 김평식, 한국행정학회 하계학술발표논문집 vol. 2015)을 참고하여 ‘소확횡 (직원 절도)’의 발생 요인을 살펴본다.
첫째, 개인적 요인의 경우 욕구 불만과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직원 절도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욕구 불만이 클수록 현금 절도, 물품 절도, 정보 절도에 스트레스 정도가 클수록 시간절도, 현금 절도, 물품 절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조직적 요인은 직원 절도에 대한 처벌 가능성, 직무 불만족, 갈등 정도에 따라 직원 절도에 영향을 미친다. 직원 절도에 대한 인식이 낮고 처벌 가능성이 낮을수록 시간 절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마치고, 직무에 대한 불만과 만족도가 낮을수록 물품 절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셋째, 환경적 요인은 조직 분위기와 경제적 어려움은 직원 절도에 영향을 미친다. 직원 절도에 대해 관대하고 용서해주는 조직 분위기는 현금 절도, 물품 절도, 정보 절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마치고, 경제적 어려움이 클수록 모든 직원 절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마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확횡’ 확산 방지 방안
첫째, 심각성을 알려야 한다. 관행으로 간주되는 ‘소확횡’의 결과가 징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회사 차원에서도 이런 ‘소확횡’에 대해 방치하고 있다가 갑자기 징계 등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사전에 공지 등을 통해 ‘소확횡은 심각한 문제’라는 점, ‘징계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직원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의식 전환을 위한 윤리교육이 필요하다.
둘째, 조직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직원들 스스로 무분별한 회사자산 사용의 문제점을 알고 구성원 절도가 당연시되지 않는 조직분위기를 차곡차곡 쌓아가야 한다. 솔선수범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셋째,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소확횡'이 탄생된 원인도 구성원들이 회사 안에서의 불만족을 소소한 방식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삼일회계법인의 ‘사내 실시간 익명 소통플랫폼’을 참고해 보자. ‘오늘의삼일’은 모바일로 회사-팀-개인 간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온라인 커뮤니티이다. 이 커뮤니티를 통해 구성원의 목소리를 외부에 방치하지 않고 회사가 그 의견을 듣고 검토하면서 회사와 직원 간 신뢰가 쌓였다.
직원 게시 글에 회사가 답변과 근거를 제기하며 조직 내 오해가 해소되었다. 직원의 참여는 회사에 대한 소속감과 주인의식을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개설 후 1년간 외부 익명 플랫폼에 등록된 사내 직원의 게시 글이 82% 감소하였고, 선동적인 글이 아닌 건설적인 글을 쓰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영화 ‘종이달’의 주인공이 회사 돈을 손댄 것도 시작은 10만원이었다. 깨진 유리창이 방치된 동네는 범죄율이 상승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의 소확횡은 죄의식 없이 시작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바늘도둑이 소도둑된다. ‘소확횡’을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