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 콤플렉스와 일 잘하는 사람 사이에서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존중해야 다른 사람도 나를 존중하게 된다.

by 승연

회사에서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주체적으로 일하는 사람. 회의자리에서는 논리 있게 의견을 말하고, 협업 과정에서도 필요한 요구를 분명히 하며, 때로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 현실 속의 나는 그저 '착한 후배'였다.

불평없이 맡은 일을 해냈고, 일이 애매하게 남으면, "제가 할게요."라고 먼저 말했다. 급한 일정이 생기면 습관처럼 "괜찮아요."라고 답했고, 팀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라면 나 하나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거절하면 괜히 나쁜 사람처럼 보일까 봐, 협조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나는 '좋은 후배'로 남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하루하루는 서서히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야근은 점점 잦아졌고, 머리속은 늘 일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업무량은 늘어났지만, 정작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내가 힘들다는 말을 꺼내려 할 때마다, '괜히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분명해진 건, 내가 나의 선의로 인해 점점 힘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착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양보하고, 배려하고, 웃으며 넘기는 아이. 그 말은 분명 칭찬이었고, 나는 그 칭찬을 기준삼아 살아왔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 착함이 자꾸만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착함은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을 지우고, 나 자신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는 방식이라면, 그건 더이상 착함이 아니었다. 나는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역할을 나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억울함과 피로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내가 엔지니어로 일하던 시절의 한 사건이었다. 고객사에서 품질 이슈가 발생했고, 그 책임은 우리 회사에 있었다. 나는 문제를 분석하고 고객사와 기술적인 협의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기까지가 내 일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손해비용 협상은 보통 영업 담당자의 몫이다. 그런데 그가 바쁘다는 이유로 그 일까지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정말 바빠보였고 이미 나는 그 일의 맥락을 잘 알고 있고, 해결할 아이디어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여기서 못하겠다고 하면 무능력해보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나는 본사와 고객사 사이에서 손해비용 협상까지 중재하게 되었다.

다행히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내 일은 밀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량에 허덕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이후에도 그 영업 담당자는 관련 일이 생길때마다 나에게 의지했다. "네가 해봤으니까 나보다 잘 알잖아."라는 말과함께.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외쳤다.

"그건 내 일이 아니야."

하지만 입밖으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해왔는데, 갑자기 못하겠다고 말하면 관계가 틀어질 것 같았고, 동료를 외면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두려웠다. 그 애매한 침묵이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몇번의 케이스를 만나고, 나는 결국 상사에게 말을 꺼냈다.

업무 분장 조정이 필요하다고.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상황은 놀라울 만큼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그 일은 영업쪽에서 해야 하는게 맞아요."

상사의 말한마디로.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일을 대신 해줘서도 아니었다.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경험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본다.

착한 사람과 일 잘하는 사람,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답은 생각보다 분명했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타인에게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

무례하지 않되, 할말은 할 수 있는 사람.

협업을 중요하게 여기되, 내 업무의 기준과 경계를 지킬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소모시키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


나는 지금도 갈등을 피하고 싶고,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일이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갈등을 무조건 피하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경계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오래, 더 건강하게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항상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

대신, 너 자신에게 정직해.

스스로를 존중할 때, 다른 사람도 너를 존중하게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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