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 이해의 중요성
나는 패기와 열정이 넘치는 신입사원이었다. 회의 시간에 어떻게든 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아이디어를 내려고 노력하였었다. 일이 생기면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게 조직에 기여하는 방식이라 믿었고,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느낀 것은 회의에서 내가 낸 의견이 곧 내 일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를 내면 "그건 네가 내일까지 정리 해볼래?"라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따라왔고, 함께 문제를 고민하자는 의도가 어느새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회의 도중 옆자리 선배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거보다 지금 이게 더 급하니까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그순간,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묵살당한 기분이 들었고, 그 이후 회의에서 말을 아끼게 되었다. 말하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말을 한 뒤에 따르는 감정의 파장과 책임의 무게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각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회의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 누구의 말이 어떤 맥락을 담고 있는지, 그 속에 숨어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살폈다. 특히 상사의 표정 하나, 한마디 말이 가지는 무게는 컸다. 그렇게 나는 '말하는 사람'이기보다 '분위기를 읽으려는 사람'이 되었다.
조직 안에서의 듣기가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와 감정, 맥락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그저 듣는 것이 앙니라, 해석하고 예측하고 대응까지 준비해야 하는 듣기.
회의에서 상사가 "이 일, 누가 해줄 수 있을까요?"라며 나를 쳐다보는 것은 종종 '네가 해라.'라는 신호였고,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죠."는 사실상 '그건 안하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조직의 언어는 늘 직설과 우회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한마디 말을 꺼내기 전, 내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검열이 이뤄졌다.
'이 말을 하면 누군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이 의견이 반대되면 괜히 분위기를 깨지는 않을까?'
' 팀장님은 이걸 싫어하시지 않았던가?'
이러한 생각들이 내 입을 막았다. 표현은 곧 책임이 되었고, 그 책임은 종종 나에게 부담이었다. 내 생각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표현은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듣고 생각만 하느라 말할 때를 놓쳤던 경우도 많았다. 조직은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항상 침묵하는 사람도 원하지 않는다. 잘 듣고 잘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해야 할 때를 알고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말이다. 그런 사람은 경청하되 존재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회사 생활은 그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조직의 언어는 감정과 관계가 섞인 고차방정식이다.
회의에서 "이 일, 누가 해줄 수 있을까요?"라는 말이 나오면, 그것이 진짜 질문인지, 특정인을 지목하는 말인지 분별하려 애쓴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라는 말이 정말 보류인지, 사실상 폐기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조직에서는 말의 겉면보다 '맥락'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듣는 사람'이란 단순히 조용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해석에만 몰두하면, 나의 목소리는 점점 사라진다. 아무도 나의 감정과 영역을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
나는 처음에는 내 말솜씨가 문제라고 생각했으나, 경험이 생기면서 경청과 존재감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확신과 스스로에 대한 경계 설정이 명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두가지 원칙을 세웠다.
*상대의 맥락을 읽되, 그 말과 맥락에 휘둘리지 말 것.
* 내가 말해야 할 때는 분명하고 정중하게 말할 것.
"저는 그렇게 이래했습니다만, 혹시 제가 놓친 것이 있을까요?"라는 말은 회피가 아니라 확인이다.
"이 부분은 제가 일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라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라는 말은 고집이 아니라 존중이다. 듣는 것도 어렵지만, 말하는 것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둘 다 배워야 한다. 그래야 조직 안에서 무너지지 않고 나를 지켜낼 수 있다.
지금도 완벽하게 듣고 말하진 못한다. 여전히 눈치를 보고, 더 정확히 짚었어야 했던 아쉬운 순간들이 많다. 그렇지만 더이상 '침묵이 안전하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군가는 말을 해야하고, 그 말이 조직을 움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직에서의 듣기는 기술이며 태도이고, 나의 경계를 지키는 수단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진 언어로 표현할 때 좀더 나답게 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