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이 무너진 날

처음 맡은 프로젝트의 실패

by 승연

처음으로 팀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했다. 막내 티를 겨우 벗고 내가 일을 할 수 있겠구나라고 느꼈을 즈음, 우리팀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당시에는 모바일폰이 발전하는 시기였는데, 우리 팀은 모바일 폰에 들어가는 RF부품을 개발하는 것이 임무였다. 회사에서도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우리 팀의 분위기도 진지하고 치열했다. 야근은 당연한 것이었고, 머릿속엔 하루종일 CAD 도면과 내가 어떤 방식으로 테스트를 해야할지가 떠다녔다. 물론 내 역할은 핵심 설계는 아니었지만, 분명 나는 팀의 일원으로 이 프로젝트에 '기여'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느꼈다.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감각이 참 짜릿하고, 또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한편,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상한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RF 모듈의 성능이 생각처럼 나오지 않았고, 시뮬레이션과 실제 샘플 사이의 결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여러번 시도를 했지만 테스트 결과는 늘 기대와 어긋났다.

매번 테스트 결과를 분석하며 원인을 찾으려 했지만, 한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도 다른 문제가 튀어나왔다. 우리는 좀더 테스트 베드를 늘려가며 오류를 해결하고자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성능의 한계는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그 와중에 경쟁사에서는 이미 차세대 제품을 출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가 안간힘을 쓰며 이루어 내려고 했던 기술은 이미 누군가에게는 '어제의 기술'이 되어 있었다.

결국 회사는 프로젝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들 마음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실패한 것인가?'

그날 나는 '일'이 아니라 '나'가 부정당한 것 같았다. 머리로는 기술적 실패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달랐다. 처음으로 내가 마음으로 뛰어들었던 프로젝트였기에, 첫 도전이었기에, 이 실패는 단순한 결과 이상이었다.

'내가 제대로 못했나?'

'혹시 내가 부족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닐까?'

'이런 것이 프로라는 세계의 냉정함인가?' 어제까지 프로젝트 계획이 빼곡히 적혀있던 화이트보드는 누군가 일부러 흔적을 없애버린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 시간들이, 우리의 노력이 통째로 사라진 기분이었다.

"괜찮아.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잘해보자." 팀장님이 그렇게 위로해주셨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토록 애쓰고 고민했던 날들이 결국 아무 결과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창피했고, 그 실패가 곧 나 자신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감정이 가라앉고 나니 조금씩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너무 '결과'만 내려고 조바심이 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과정'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무엇을 놓쳤을까?

다음엔 어떻게 다르게 접근해 볼 수 있을까?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분명히 배운 것이 있었다.

* 제품의 개발만큼이나 제품을 고객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

* 사용자의 니즈보다 기술 스펙에 몰입한 우리의 시선이 어긋나 있었다는 것.

*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시장의 속도와 타이밍을 놓치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경험은 나에게 중요한 기준을 만들어주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새로운 프로젝트가 주어졌을 때, 나는 좀더 넓은 시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기술뿐 아니라 시장을, 제품뿐만 아니라 그것을 쓸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처음 프로젝트부터 성공을 했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단편적인 엔지니어였을지도 모른다.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난 그날은 분명 내 자존심이 무너졌던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에와서 돌이켜보면 그날이 바로 내가 진짜 일의 세계에 발을 디딘 날이기도 했다.

도전은 항상 나를 일깨운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도전한 그 자체가 나를 한걸음 더 성장시켰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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