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회복탄력성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일의 강도나 업무량 때문은 아니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프로젝트의 기한이 빠듯해도, 야근이 이어져도, 팀 안에서 으쌰으쌰하며 서로 도와주려는 마음이 느껴지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와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그 불편함은 일보다 훨씬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작은 피드백조차 내게는 불필요하게 날카롭게 들렸고, 나는 마음속으로 점점 방어적인 태도를 쌓아갔다. 업무적으로 부딪히는 순간마다 '왜 저렇게 밖에 말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마다 대화는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감정을 곁들인 공격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상사를 조금씩 피하는 습관이 들었다.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점점 나 스스로가 상대와의 거리를 두며 '저사람은 나와 맞지 않아'라는 결론을 내려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 안에선 사춘기 소녀마냥 '그냥 다 싫다'라는 감정이 자라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종의 회피였다. 말을 꺼내서 서로 오해를 풀 용기를 내지 못했고, 내 감정만 쌓으며 상대방을 '불편한 사람'으로 규정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거리를 두는 것이 결국 나에게 더 큰 고립감을 주었다. 내가 피한다고 해서 그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고, 일 때문에 종종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불편함이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과 출장을 가게 되었다. 오고가면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과 회사의 예전 모습에 대해 애기해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도 여기까지 쉽게 온 것은 아니구나'
나는 늘 '나와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그 사람을 불편한 존재로만 생각해 왔지만, 사실 그는 이 회사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버틴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회사의 굴곡을 함께 겪었고, 수많은 후배들의 앞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 물론 그 과정에서 좋은 평판만 있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오랜 시간 한 조직에서 자리를 지켜낸 것은 사실이다. 내가 감정적으로 쌓아둔 불만 뒤 그 사람의 긴 시간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내 마음속에 단단히 닫혀 있던 문틈이 살짝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얼마 후, 회식 자리가 있었다. 평소 같으면 형식적인 대화만 나누고, 그 사람과는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따라 나는 작은 용기를 내고 싶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린 순간, 나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선배님께서 오랫동안 이 자리에서 열심히 해 때문에, 저 같은 젊은 사람들도 이렇게 자리를 얻고 일하고 있네요. 저는 그게 참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내 말이 끝나자, 그 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늘 무표정하거나 다소 냉소적으로 느꼈던 얼굴에 큰 미소가 번졌다. 아마도 예상을 못했던 것 같다. 나의 '감사하다'라는 표현이 그분에게 낯설면서 진심으로 다가간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우리 관계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전처럼 사사건건 어긋나던 대화가 조금씩 맞아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성격 차이도, 일하는 방식의 차이도 존재했지만, 적어도 서로의 말을 들으려는 태도가 생겼다. 이전에는 내가 말할 때 그 사람이 바로 반박하거나 지적한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내 말을 끝까지 들을 거라는 신뢰도 생겼다.
한편 신기한 것은 내 안의 변화였다. 그날 '감사하다'고 표현한 그 한마디가 나를 바꿔놓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그 말의 주인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 나 역시 그 태도를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고 상대를 바라보려 노력했고, 그것은 내 태도와 표정에도 드러났다.
나는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은 솔직함이지만, 그 솔직함이 긍정의 언어로 표현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깨달았다.
우리는 직장에서 수많은 순간 솔직해지고 싶다.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힘듭니다', '답답합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 입술을 뗐다붙였다 한다. 그러나 그 솔직함이 자칫 관계를 더 날카롭게 함을 알기에 입을 다문다. 한편,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하고, 내가 느낀 작은 감사라도 표현하는 한마디가 관게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마음속에 묻혀있던 긍정적인 감정을 관계에 불어넣는 것이다.
직장 생활에서 모든 사람이 내 편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대부분 중립이거나, 때로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진심어린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사람이 내 편이 되어주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한사람의 존재는 생각보다 큰 힘을 준다.
관계의 회복탄력성은 결국 내 안에서 시작한다. 내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노력과 존재를 인정하는 작은 용기, 그리고 그 용기가 건네는 긍정의 언어가 벽을 허물고, 함께 할 수 있는 다리를 놓는다. 그 다리 위에서 우리는 다시 서로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
내편을 만드는 법은 아주 사소하다. 그저 마음을 담아 '감사하다'는 한마디를 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