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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현 Jan 06. 2021

아 달콤한 나의 ‘무차차’

베이비시터와 가정부


멕시코의 물가는 생각보다 비싸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깜짝 놀랄 만큼 저렴한 것이 바로 인건비다. 인구가 많고 빈부 차가 심한 이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는 넘쳐나고, *법정 하루 최저임금은 141.70페소. 약 7810원에 불과하다.(2020년 기준/시급아님) 이 정도의 임금으로 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 건지 의아하고 딱한 마음도 들었지만,  사실 그래서 나 같은 전업주부는 가정부나 베이비 시터를 두고 맘껏 누릴(?) 수 있는 천국 같은 곳이기도 하다 *무차차는 하루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300~400페소. 한국돈(1페소=50원)으로 2만 원이 안 되는 금액이다. 시급으론 2500원이다.

*2020년 멕시코 정부는 국가최저임금위원회(CONASAMI)가 내년 근로자의 하루 최저임금을 15%인상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최저임금은 올해부터 141.70페소로 인상됐다. 기존 최저임금은 123.22페소였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그동안 멕시코의 최저임금이 국제적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며 지난해 20% 인상을 감행했다. 이번 인상분까지 포함하면 로페스 오브라도르 취임 후 60% 최저임금이 인상된 셈이다. 이번 인상으로 멕시코는 세계 135개국 중 최저임금 순위로 76위 국가가 된다

*가정부는 여기서 ‘무차차’라고 부른다. 무차차 muchacha는 소녀, 여자 젊은이 등을 뜻하는 말이다. 현지인들은 가정부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지 않은데 유독 이곳에 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말인 것 같다.

미운 네 살 첫째와 생후 6개월 된 둘째를 데리고 얼마나 막막하던지. 도움을 받을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도와줄 사람(가정부, 무차차)을 찾는 것이었다.  멕시코 교민들이 모인 다음 카페에 가정부를 찾고 있다는 글을 올렸고, 기다림 끝에 ‘한국인 집에서 오래 일해본 경력이 있어서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소개와 함께 전화번호를 받았다. 이곳에 온 지 2주째에 만난 첫 멕시칸. 이름은 ‘아리셀리’였는데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화려한 호피무늬의 딱 붙는 바지를 입고 진한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손에는 와인색의 긴 손톱을 붙이고 있었는데 저 손으로 과연 청소는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땅치 않았던 첫인상과 달리 깔끔한 성격이라서 집에 오자마자 매트를 들고 소파를 밀어서 빠르고 능숙하게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멕시코에 꽤나 적응한 후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멕시칸은 청소를 ‘빠르게’ 잘 한 편이었다. 한국인 집에서 오래 일했다고 하더니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DNA를 알게 된 것이리라. 어쨌든 아리셀리는 우리 집에서 일주일에 세 번 청소를 도와주었지만 잦은 거짓말과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3개월 만에 해고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3개월 동안 교통사고도 몇 번 났고 아파서 못 온 날은 그보다 더 많았다. 왜 일하는 날 아침이 되어서야 각종 사건사고가 생기는지. 처음엔 놀라고 진심으로 걱정해줬는데 여러 번 반복이 되다 보니 나의 진심이 민망해지고 사람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가족 모두 긴 여행을 가니 당분간 오지 말라고 대충 둘러대며 연락을 끊었다. (멕시코에서 해고할 때는 보복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단다.) 그러고보니 서로 거짓말이겠거니 하며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거짓말도 문화다.

두 번째 구한 사람은 70대의 ‘과달루페’였다. 친구네 집에서 몇 년째 일하고 있는 무차차 ‘모니’의 이모였다. 첫째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시간 동안 둘째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등원 시간이 아침 7시 반이다) 나이는 좀(너무) 많지만 홈 cctv를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찌 생각했든 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과달루페는 우리 집으로 매일 출퇴근했다. 가끔 멕시칸 음식도 만들어주고(진짜 맛있음) 아이들을 손주처럼 예뻐해 줘서 좋았다. 그러나 자꾸 숨차 하고 어쩔 땐 내가 오히려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 잦아지면서... 스스로 좀 쉬고 싶다고 했다.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정이 들었는데 코로나 시국에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난 사람이 에리카다. 에리카의 엄마는 다른 한국인 집에서 상주하면서 베이비시터로 일 하고 있었고 언니는 또 다른 한국인 집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었다. 에리카 엄마인 마리아와는 그 집을 드나들며 얼굴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우리 집에서 아이를 봐줄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딸을 소개해줬다.


에리카는 83년생인데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이 일을 시작하려 한다고 했다. 깔끔하게 올려 묶은 머리와 매끈한 피부 단정한 옷차림이 딱 맘에 들었다. 부끄럼이 많은 딸 둘도 처음 보자마자 인사를 하는 등 거부감이 없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에리카와 난 잘 맞았다. 개떡같이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었고 내가 아이 밥을 먹이고 있으면 후딱 장난감을 정리하고, 내가 음식을 하고 있으면 애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서 놀아주는 식이었다. 에리카가 있는 동안 내 시간이 갑자기 많아지자, 기분이 이상했다. 운동도 다니고 스페인어 과외도 시작했다. 예쁜 운동복도 사고 쇼핑도 좀 하고. 피부 관리도 하고, 아 바로 이런 게 사람 사는 거지 ㅎㅎ아이들을 돌보느라 피폐해졌던 나의 삶도 광명이 찾아들었다. 나의 멕시코 라이프는 에리카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이 에리카랑 노는 시간이 많아지고, 나도 에리카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면서 무차차 한 명을 더 고용하기로 했다. 에리카가 소개해준 본인의 친구 ‘베티’는 일주일에 두 번 불러 집안 대청소를 맡겼다. 청소와 육아를 맡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우 에리카 좌 베티.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있을까.


그러나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을 거쳐 멕시코에도 매일 기하급수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난 그해 4월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남편 없이 독박 육아를 하고 또다시 멕시코에 들어와 두 달째 집콕 육아를 하면서 쭈그리 엄마로 돌아왔다. 세끼 밥 차리고 돌아서면 설거지를 해야하는 삶으로. 아 정말이지, 가정부 2명과 함께한 그 시절은 달콤한 6개월이었다.(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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