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2장 리뷰
지난 재판들에 대한 회고 속에서 우리는 일사부재리 원칙의 당위에 대해 의구심을 품곤 한다. 이는 물론 판정 당시의 재판부나 검사 혹은 형사들에 대한 불신에 기인하는 것인 경우도 있으나, 많은 경우 그러한 가치판단을 가능하게 한 거대한 시대정신에 대한 비판까지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나치 정권의 고위 관료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겨냥했던 당시 이스라엘 여론의 강한 분노는 너무나 일상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 말한 대로 그들은 해당 재판에서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 되"(p.53)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때 판결은 어떤 "'교훈'을 담은"(p.57)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아이히만을 예루살렘의 '정의의 집'에 세운 것은 과거에 행해진 그의 어떤 구체적인 행위라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본 미래의 눈, 움직이는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위 같은 법에 대한 원칙적 입장에서 볼 때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pp.73-74)라는 변호사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Robert Servatius)의 말은 충분한 공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일련의 '끔찍한' 행위라 불리는 것들은 그 행위의 시점과 일치하는, 어찌 보면 더욱 혹독했을 법의 철조망 안에서 지극히 선량한 것으로 판정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아무리 매 순간 선택의 무거움을 가중시킬지라도, 한 개인에 대해서는 그가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피로감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한참 미래의 예루살렘에서조차도 "심판대에 오른 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p.52)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판의 역사성이 불러오는 딜레마는 사법적 정의(正義)에 대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입장을 다소 모호하게 만든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의 1장에서 그는 아이히만의 특정 행위와 그것의 부수효과, 가령 "그의 행위가 야기한 타인의 고통"(p.57)이 적어도 사법적 가치판단의 측면에서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비록 그의 견해가 재판의 정치적 이용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과잉 표출된 것일지라도 말이다). 이는 아이히만의 행위가 사실상 신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설명함으로써도 뒷받침된다(p.87). 그렇지만 아렌트는 "바람은 그를 어떤 중요성도 성과도 없는 단조로운 삶으로부터 역사에로, 그가 이해한 방식대로 말하자면, 언제나 움직이는 '운동' 속으로 밀어 넣었다."(p.87)라고 씀으로써 행위의 역사성이 개인의 적극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이때 누군가의 삶이 소시민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폄훼의 표현이기보다는, 행위가 갖는 역사적 책임에 대한 무심결의 동의에 가깝다.
이러한 딜레마는 물론 아렌트만의 것은 아니다. 아이히만이 "그렇게 하지 뭐."(p.87)라고 말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사태의 무게를 더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은―그것이 거대한 규범적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개인의 두려움에 기인한다는 점에서―아이히만을 역사의 큰 흐름으로부터 열외시키지는 못한다.[1] 그렇기에 신념의 부재 자체는 행위에 면죄부를 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념의 부재는 어떤 한 신념의 과잉, 즉 특정 체제로 편입함으로써의 수동적 의미생산이라는 신념의 과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이히만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복종적 순응성"(p.60)과는 대비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응성을 보인다. 한편 인간의 어떤 한 행위가 그의 의식의 특정한 상태를 전제하는 것이고, 의식의 체제의 규범성이 이해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인간의 각 행위는 그 현장의 시대정신을 부분적으로는 대변한다.
이 같이 말하는 것은 분명 우리 삶에 애증 섞인 피로감을 더한다. 아이히만이 너무나 정상적인 인물로 보인다는 점은 우리 또한 많은 경우, 이러한 삶의 피로를 쉬이 감내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뿌리내리고 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일상에서는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사법적 정의가 단편적 행위의 그렇지 않은 측면, 즉 그것의 역사적 무게감을 포착하는 것에 대해 일련의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가 그러한 회의를 드러내는 방식의 모호성이 분명히 밝히는 바는 재판의 현장은 줄곧, 그리고 앞으로도, 복수의 시대의 격전지라는 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의 나침반을 돌리는 것은 개인이므로, 가장 많은 우려가 향하는 바는―누군가의 약함 내지 불성실함이기보다는―오히려 제삼자의 위선이다.
[1] "나는 지도자 없는 어려운 개인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 누구에게서도 지령을 받지 않고 명령이나 지휘도 더 이상 나에게 내려지지 않으며, 참조할 수 있는 어떠한 포고령도 없게 될 것을 예감했다."(p.86)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