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여행의 이유》 - 치유로서의 글쓰기의 한 사례
무언가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눈앞에 놓인 것이 종이 비슷한 것이라면 펜을 들 것이고, 많은 경우 키보드도 두들긴다. 긋고 때리는 일련의 가학 행위 뒤에 남는 것은 한 편의 글, 혹은 백지이다. 그런데 이런 상반된 결과물을 가르는 지표는, 쓰고자 하는 의지가 번득인 순간 내뱉었을 하나의 단어이다. 그것이 추상적 개념이든 구체적 사물이든 간에 이후의 사고는 바로 그 최초의 총성으로부터 연상되는 또 다른 단어들을 향해 그물 형태로 뻗어간다. 그렇게 형성된 단어들의 관계망을 우리는 하나의 사고 체계로 인식한다. 하나의 단어는 그렇게 하나의 글로 성장한다.
무심결 등장한 단어는 그것이 떨어져 나온 신체와 본래 한 몸이었던 양 지독하게 그 실루엣을 묘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구토와 같다. 단어의 연쇄가 점차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표면에 떠오른 자신보다는 그 아래 감추어둔 심연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p.81)기 때문이다.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옥죄어온 기억을 소환한 점은 오직 이러한 점에서 그 실체적 논리를 드러낸다. 《여행의 이유》는 '여행하기'라는 행위의 원인을 탐구하지 않는다. 탐구의 대상은 김영하라는 개인이 '어째서' '여행'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나 하는 점이다.
여행의 일차적 이미지는 거리감이다. 바다를 건너든 구름을 가르든, 짊어진 행랑이 무겁든 가볍든, 행자는 출발지로부터 멀어진다는 감각에 몸을 맡긴다. 김영하의 표현대로 여행지에서 "특별한 존재"(somebody)는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가 된다(p.155). 그럼에도 혹자는 이런 '노바디'이고자 떠난다. 익숙한 곳, 일상인 곳, "오래 살아온 집"에는 기억의 얼룩, 상처가 또한 있기 때문이다. 떠남으로써 인간은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pp.64-65). 이런 의미에서 여행은 자유를 향한다.
한편 여행의 거리감은 자유인의 필연적인 고독 또한 알려준다. 거리의 모두가 평등을 외칠 때, 난간의 '노바디'들은 그 거대한 담론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p.124). 김영하의 비유를 따르자면 그것은 모국어의 부재(pp.79-80)이고 '그림자'의 상실(pp.124-125)이다. 관습의 지반을 딛고 서있지 않은 이는 그 몸이 가벼운 만큼이나 공허함에 몸서리친다. 키클롭스의 동굴에 제 발로 들어간 오디세우스의 무모함에 질타만큼이나 공감이 쏟아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집 떠난 이의 서러움은 자유에 대한 회의마저 불러온다. 온갖 상처의 현장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 하는 수적 계산은 점차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여행의 길에서 이런 상처의 현장은 결코 멀어지기만 하지는 않는다. 분명 떠나온 이는 생채기의 물증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상처의 연어들, 곧 "오래 살아온 집", "모국어", "그림자" 따위를 의식의 표면으로 인양해낸 것 또한 그의 여행, 아니, '여행'이라는 한 단어이다. '여행'이라는 두 음절이 달라붙는 것들을 추적하면 할수록 김영하가 몰두(해야만)했던 바는 여행하기의 시학이기보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이주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어린 날 그는 그러한 강제적 이주의 사태를 단지 인내하려 했다.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의지는 그를 모험 소설들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품고 있었을 "안정에 대한 갈망"은 그대로 마음속에 남아, 그가 고백하는 성격대로의 김영하를 만들어냈다(p.193).
이처럼 여행은 한편으로 과거의 상처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트지만, '여행'이라는 단초는 바로 그 과거의 현장으로의, 정확히는 그 현장을 의미하는 것들로의 지름길을 밝힌다. 어머니의 귀가를 갈망하는 어린아이의 "저기(fort)!", "거기(da)!" 따위의 외침의 중요성은 방향성이라는 피상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단어의 연상이 이루는 하나의 문장이 아이의 본래의 의도를 설명한다. 나아가 이 문장의 완성은 아이가 어째서, 정확히 그 음절들을 외쳤어야 했는가에 대한 탐구로부터 이루어진다. 펜을 들기에 앞서 김영하는 왜 "여행"이라 말했어야 했는가. 그는 기억 속에 똬리를 튼 강제적 이주의 상황이 이제는 끝나기를 바랐다. "여행은 이주와 달리 전 과정을 계획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p.199) 신체의 '이동'이 강제적 '이주'가 아닌 자발적 '여행'으로부터 연상되는 희망적 상황 속에서 김영하 개인은 오랜 갈등의 해소를 경험한다.
모든 글은 플롯을 갖는다. 한편 《여행의 이유》는 강제적 이주의 종료라는 염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소개한 "추구의 플롯"(p.19)을 따른다. 김영하식 추구의 플롯에서 "표면적 목표"가 여행이라면, "밑바탕 진짜 목표"는 '여행'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란 점인데, 그럼에도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한다는 서사는 유지된다(p.21). 그러나 마음의 위안은 기억을 단지 재생시키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글쓰기가 갖는 치유의 능력은 그렇기에 오로지 은연중에만 그 빛을 발한다. 중요한 것은 파편적으로 연상된 몇몇 단어들에 달라붙어 있는 구체적 기억들을 주저 없이 받아들일 행자의 과감성이다. 그러므로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이라는 테마는 그 자체로 치유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찾으려는 이야기는 작가 내면에 자리하는 것이나, 엘도라도에라도 감추어진 듯 쓰는 이의 여정은 멀고도 험하다. 그렇기에 최초의 단어를 발굴하는 것조차도 이륙 시의 모험심을 필요로 한다. 물론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p.35) 불가항력의 이주가 미래에도 반복하리라는 "믿음"은 온갖 단어가 솟아오르는 여행지에서의 "현실"에서 점차 변화해간다. 미래의 불안은 종종 과거의 불행을 놓아버리지 않는 데에서 비롯한다. 물론 현재는 과거에게서 길러진 것이지만, 과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또한 현재이다. 시간이 보편적인 만큼 모두에게는 각자의 단어의 울림이 있고, 따라서 그 진동을 외면하는 일은 단순한 사고에 그치지 않는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문학동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