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비선실세 사건을 바라보며
나는 '나라'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사랑은 적어도 그것이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향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믿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실재성의 강도에 대하여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게 남아있는 온기와 신체의 평온함, 혹은 역겨움, 그 실재성의 구성물들 간의 현상적 일관성 등등에서 표출되곤 한다. 그렇기에 만약 내가 실재성의 강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구체화한다면, 그 대상에는 어쩌면 나의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 옷가지, 책들, 음악들, 나무들, 하늘 등등은 포함될 수 있을지라도, 단지 그것이 '있다'라고 주장되기만 하는 것들은 결코 속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대한민국'이라 특정할 수도 있을 '나라'라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전제되고 선재하는 원리로서 우리의 언어습관이나 제도 일반에 등장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너의 나라를 사랑하라."라는 명령은 두 가지 지점에서 본성적으로 우리를 기만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우리는 '나라'의 실재함을 만지지 못하고, 둘째로 '나라'의 최소한의 실재함은 개별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인 신봉/광기에서 기원하고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나라'에 대하여, 혹은 나라의 이념이나 체제에 대하여 논하기를 꺼려한다. 아니, 꺼려한다기보다는 그 물음 자체가 나에게 닿기 전에 소멸해버리기에 그러한 때에 나는 단지 무의미에 버려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는 몇 십 년 전, 그리고 특히 최근에 와서 높은 빈도로 소모되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단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을 보듬는 넓은 어깨의 거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인 환상 속에서 개개인을 옭아맨다. 인간 개개인을 동일화하려는 노력에서 기인한 '제도'라는 체계 하에서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민주주의만을 향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이데올로기, 종교, 국가 이념 등등은 존재를 좀먹는 제도 일반에 기대어 있지 않은가. 즉 제도라는 환상을 정당화하려 애쓰는 한 우리는 '각자의' 주인조차도 될 수 없다. 도대체가 헌법이라든가 실천이성비판, 바이블, 명심보감 등등이 우리 개인에 대해 어떤 권위를 지닌다는 말인가.
그럴진대 이번 최순실 사건은 그다지 비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너무나 깊은 환상을 안고 살아왔던 것은 아니냐고 묻고 싶다. 요컨대 우리의 행위 양식 하나하나가 제도라는 유령의 발길 아래에 낙마해있는 한 각자의 개별적 주인-됨의 가능성은 철저히 지연되고,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 실망만을 안겨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에 정언명령이 새겨져 있는 바를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지한 바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억압하고, 나아가 제도 일반이 현상하는 바와 같이 우리 자신들의 집단을 질적으로 균등화 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이면에서 제도와 언어체계는 끊임없이 우리의 선의지에, 영성에, 이성에, 바로 그 치졸한 이성에 호소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같은 것들이 헛것임을 자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안을 잠재우는 평안, 혼돈을 잠재우는 질서, 그것들 안에서 평이하게 유지되는 삶을 우리는 온전히 나의 삶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와 같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시기적절하지 않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간에 울려 퍼지듯이 헌법과 민주공화국의 의미, 국민의 지위, 대통령의 정의상의 한계 등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박근혜 씨는 하야해야 한다거나 검찰이 부패했다거나 거국내각을 수립해야 한다거나 하는 목소리에 동참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즉 제도 위의 선량한 시민들이 이 같은 언사들을 주고받고 있는 거국적 움직임에 대한 찬사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야말로 다시금 되물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무엇을 위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시선은 각자의 존재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사유를 향하고 있는가.
존재와 사유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종종 사유의 길을 선택하기를 강요받는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사유에 일치시키곤 하는 관습에 의한 것일 수 있고, 다른 편으로는 우리 인간 종이 각자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의 한계적 구도와 그 이면의 제도적 영향사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사유화된 것들, 가령 보편개념들, 국가, 도덕, 이데올로기, 정당, 가족, 계약관계, 인류, 종교 등등의 감옥으로부터 그와는 다른 '장소'로 횡단해가는 것을 금지―혹은 자기검열―당한다. 우리의 절규가 많은 경우에 실패하고 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즉 우리의 몸보다 더 큰 (거대해 보이는 것들은 종종 허상으로 결론나지 않는가?) 이념들을 위해 다름 아닌 우리 몸을 희생하는 것은 그 무엇도 우리의 손에 쥐어주지 못한다. 우리 각자는 단지 각 개인이 다른 누구도 겪지 못하는 시공간 속에서 체험하는 바의 진리를, 끊임없이 동요하고 분리되며 결합하는 진리를 위하여 봉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는 일은 보다 나중의 것이며, 그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은 그 테두리 바깥의 진리들, 즉 한 명 한 명의 타자들 또한 사회의 풍파 가운데 흔들리며, 그렇기에 각각이 독보적으로 진귀하고 존경할 만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가운데 무엇보다도 천박한 일은 우선 남에게 명령하고 명령받으려는 정신―왜냐하면 그러한 일은 자신 바깥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못할 때 일어나므로―이고, 그보다 더 역겨운 것은 바로 그러한 정신 상태의 이유를 자기 바깥으로 돌려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애쓰는 정신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일상에 깊게 스며들어 있으며, 특히나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이러한 정신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동시에 그 최대의 수혜자가 되는 데에만 골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 정부와 집권당, 그리고 비선실세로 지목되는 몇몇 인물들의 집단적인 천박성은 나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살피지 않는 대중 각자의 정신이 확장/비대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이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는 것을 촉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또한 그 주인-됨의 가치가 타인에게도 동등하게 발현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하야"라는 외침의 본질이 자리해야 하는 장소는 국가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어떤 곳이다.
2016.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