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집 "Born This Way"를 중심으로
'상처-주기'가 쉬운 사회가 되어 간다. 이는 정상성에 대한 맹신과 그에 따른 존재론적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즉 타자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은 단순한 즉물적 상해-입힘이기보다는 존재론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지금부터 논의하게 될 '상처'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정신적 상흔[1], 달리 표현하자면 의미망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전제한다면, 그와 같은 일은 개개인의 존재론적 정당성이 파괴되었을 때에, 보다 시원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러한 정당성이 타자―개인이든 집단이든―로부터 무시·배격되었을 때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나 특정 성적 지향자들 등의 존재론적 정당성이 사실상 논외로 부쳐지고, 그 일을 수행한 그들 내집단에 대하여 내부적인 정상성 수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그와 유사한 상처-주기의 사례들, 가령 인종차별이나 외모차별, 듣는 이를 고려하지 않은 언어 사용 등등 모두에 해당한다.
그러나 정상성이라는 개념은 세계에 대한 현상적/경험적 접근에서 바라볼 때에 타당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는 사실상 무정상적인 방식으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즉 정상성 자체는 자의적으로 생성된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세계를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으로 이분하고자 한다면, 어떤 보편자적인 본질에 대하여 말해야 하며, 그것의 실재성이 경험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정상과 비정상은 개별적 특성이기보다는 집단적 범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가장 설득력 있는 근거는 진화에 대한 도킨스적 해석과 사회진화론적 변용에서 제시된다. 그들에 따르면 생물학적 진화는 종족번식에의 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는 '더 나은', 달리 표현하자면 특정한 사회적 기능을 더 잘 수행하는 체계로 진보해나간다. 이러한 설명방식을 좇자면, 생물과 사회는 어떤 정상적인 범위를 '필연적으로' 가지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비정상적 탈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계는 그 같은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우선 진화는 자연선택적이기보다는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표현하듯 자연표류적으로 나타난다. 즉 진화는 일종의 "방랑하는 예술가"[2]이다. 진화의 과정 속에서 각 개체는 그들에게 우연적인 방식으로 주어지는 외부 조건을 일종의 재료로 삼아 미래적인 도약을 창조해간다. 우리는 난자까지의 정자의 움직임에서 어떠한 의지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조건적으로 주어진 소세계의 틀 안에서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양상으로 헤엄칠 뿐이다. 또한 우리의 의식은 데카르트가 얘기한 '하나의 생각하는 것'(a thinking thing)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요즈음의 인지과학에서 인간의 신경계적 작용을 직선적, 단일적인 것이 아닌 창발적 모델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은 일종의 창발로서, 가능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현상적인 면에 있어서도 복수(複數)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지과학적 담론은 니체적인 의식 개념을 뒷받침한다. 니체에게서 의식은 상상의 영원회귀적 담지자이면서 힘에의 의지에 따라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들이 단일한 위계질서를 이룸으로써 단일한 자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존의 힘에의 의지 체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의식 체계를 구성해 나간다[3].
이러한 의식 개념은 현대철학에서의 시뮬라크르적 다수성, 즉 분열하는 소수적 의식의 담지자 개념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이 같은 의식 이해의 변화는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상성 담론과 그에 기인하는 타자-침투, 즉 상처-주기를 극복하는 실마리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세계관에서 자연스레 타자는,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레비나스가 얘기했든 각각이 무한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각자는 불가해적이고 불가침적인 성역이 되며, 동시에 각자의 분열적 의식의 면면들은 긍정되고, 자기혐오의 연쇄는 끊어지게 된다. 한편 이러한 분열적 의식의 논의는 반본질주의적 담론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개별자들은 그 자체의 선험적 본질에 따라 존재한다기보다는,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세계-내-존재'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본질 또는 실체가 아닌, 세계와의 관계망, 또는 내적인 의미에서의 힘에의 의지가 선행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경우에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면서 각자의 '고유한 자기성'을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박한 수준에서의 자기성 주장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배격을 낳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세계를 단순히 자기성의 확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할 때에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비자기성을 목격하게 되면 일종의 존재론적 낯섦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상처-주기는 이러한 낯섦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세계의 분열적 다수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레이디 가가가 그의 작품 전반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러한 지점을 넘어섰을 때에 이루어지는 자유와 평등이다. 이는 "born this way"라는 선언에서 단적으로 표현된다.
2집 "Born This Way"에서 가가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목적론적 지향을 상당히 직설적인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Born this way!"라는 선언은 이러한 바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싱글 "Born This Way"에서는 크게 세 가지 의미에 있어서, 즉 종교와 성적 지향, 그리고 인종에 있어서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It doesn't matter if you love him or captial H-I-M
Just put your paws up 'cause you were born this way, baby
(…)
No matter gay, straight or bi, lesbian, transgendered life
I'm on the right track, baby I was born to survive
No matter black, white or beige, chola or orient made
I'm on the right track, baby I was born to be brave[4]
이처럼 레이디 가가의 세계관에서 개인의 신앙심이나 성적 지향, 인종 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doesn't matter…/no matter…)." 오로지 각자의 생에의 의지와 그것을 감내할 용기만이 요구될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와 같은 자유와 평등이 무제약적이고 자의적으로 수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레이디 가가의 자유와 평등은 어떤 특정한 조건을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born this way"라는 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후험적이기보다는 선험적으로 부여받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가가는 인간 개개인의 어떤 본질을 상정하고, 본질주의적인 방식으로 각자의 자유와 평등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편 이러한 가가의 본질 개념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I'm beautiful in my way 'cause God makes no mistake
I'm on the right track, baby I was bron this way
Don't hide yourself in regret
Just love yourself and you're set
I'm on the right track, baby I was born this way[5]
즉 레이디 가가에게서 각자는 어떤 신적인 본질을 선험적으로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신적 본질에는 '실수'가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아름답다. 또 이러한 신적 설계는 각자가 스스로의 삶의 방식, 스스로의 본질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본질은 각자의 '여왕'으로, 또는 '머리카락'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I can be the queen that's inside of me
This is my chance to release and be brave for you, you'll see
I can be the queen you need me to be
This is my chance to be the dance I've dreamed it's happening
I can be the queen[6]
Whenever I'm dressed cool my parents put up a fight
And if I'm hotshot, mom will cut my hair of night
And in the morning I'm short of my identity
I scream, "mom and dad, why can't I be who I wanna be, to be?"
I just wanna be myself and I want you to love me for who I am
I jsut wanna be myself and I want you to know, I am my hair[7]
가가에게 일반적인 사회적 조건들―"Hair"에서 '부모'로 상징되는―은 우리로 하여금 개별적인 본질을 좇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억압한다. 사회는, 또는 라캉에게서 아버지 법질서로 표상되는 것들은 앞에서 언급한 정상성, 또는 일상성, 평범성의 범주로 우리를 끊임없이 내몬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는 개별적 특성에 대하여 낯섦을 느끼며, 그것이 발생시키는 자의적 질서와 그것의 정당성의 붕괴 가능성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가가 표현하듯 우리는 내적 본질에 대한 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며(the dance I've dreamed it's happening/I jsut wanna be myself and…), 그러한 본질이 사회적으로 부정될 때 정체성의 흔들림을, 달리 표현하자면 존재론적 상처를 겪게 된다.
한편 주목할 만한 것은 가가의 이러한 신적 본질은 보편적으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주어지며, 심지어는 분열적인 양상을 지니고, 그러한 본질이 현상하는 데에 개개인의 예술적 의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Marry The Night" 뮤직비디오 서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When I look back on my life, it's not that I don't want to see things exactly as they happened. It's just that I prefer to remember them in an artistic way. And truthfully the lie of it all is much more honest because I invented it. Clinical psychology tells us arguably that trauma is the ultimate killer. Memories are not recycled like atoms and particles in quantum physics. They can be lost forever. It's sort of like my past is an unfinished painting. And as the artist of that painting, I must fill in all the ugly holes and make it beautiful again[8].
이처럼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현실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하여 기억한다. 즉 실재는 오로지 기억으로서만 우리에게 유의미해진다. 왜냐하면 후설이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은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세계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가는 우리가 실재를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방식으로 기억"(remember them in an artistic way)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기억으로서의 의식은 지속적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존의 의미체계를 상실하기 때문에, 삶은 영원히 "미완성작"(an unfinished painting)일 수밖에 없게 되고, 우리는 새로운 미완성으로 끊임없이 달려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예술가이게 된다. 한편 가가는 이러한 예술가적 접근이 바로 본질을 대하는 정직한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실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의지에 따라 예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보다 자기근원적인 위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성의 권위에 기대어 실재를 단일적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이 비본질적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와 같이 예술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으로서의 본질에 대한 긍정에서 가가의 본질주의가 자유를 향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예술적 본질들은 어떤 상위적인 정상성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평등성을 지니게 된다. 이 같은 레이디 가가의 본질주의적 자유·평등주의에서 상정되는 유일한 법적 원칙은, 어떤 방식의 존재론적 상처-주기도 용인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평등 개념뿐이며, 그것은 모든 존재자가 각자의 의식의 움직임에 자유로이 따르는 것이 용인됨을 의미한다. 그러한 움직임을 막는 비예술적, 반본질적 집단지성은, 가가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신적 질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가가 자신은 시대의 예술가로서 헤겔적인 시대정신을 새로운 체계로 끊임없이 탈바꿈하도록 그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녀에게서 천국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열리게 되며, 별들이 쏟아지는 날에 모든 예술가적 희생정신을 위한 추모행렬이 이어질 것임이 암시된다.
Starry night come inside me like never before
Don't forget me when I come crying to Heaven's door
I will fly on a challenger across the sky
like a phoenix so you can remind them of the dream I bore[9]
[1] 물론 여기서 '정신적 상흔'이라는 말을 구별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이러한 용례가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이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본문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2] H. Maturana and F. Varela, 최호영 역(2013), 앎의 나무, 갈무리, p.135.
[3] 니체에게서 개개인의 의식에 매순간 맺히는 상(image)들은 개인의 내적 의식에서 영원히 회귀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매순간 달리 구조화되는 의지의 위계질서―힘에의 의지―에 따라 달리 현상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우리의 가치판단도 재생성된다.
[4] Lady Gaga, "Born This Way", Born This Way, 2011.
[5] Ibid.
[6] Lady Gaga, "The Queen", Born This Way, 2011.
[7] Lady Gaga, "Hair", Born This Way, 2011.
[8] "Marry The Night" Music Video.
[9] Lady Gaga, "The Queen",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