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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ul 14. 2022

이것은 극기훈련인가 여행인가

[고성] 계획 따위 개나 줘라 1편

시간은 흘러 7월이 되었고, 고성 여행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전혀 즐겁지 않았는데 아직도 개인 프로젝트를 다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계약서 상으로 6월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었지만, 5월과 6월 내내 회사에서 조져진 터라 부업할 에너지가 없었다. 며칠만 시간을 달라 굽실거리고 추가 작업할 시간을 얻은 나는 고성 여행 전날 하루를 통째로 부업에 매달렸다. 그리고 장장 15시간 만에 완성본을 메일로 보낼 수 있었다. 그게 새벽 5시, 여행 가는 당일이었다. 나는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금만 눈을 붙이기로 했다. 찢어질 듯한 직박구리의 울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야야, 일어나야 되는 거 아이가? 몇 시 차 타는데?"

한참 자고 있는데, 엄마가 나를 깨웠다. 폰 알람은 진작에 꺼버린 모양이었다. 내일모레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데 엄마가 깨워서 일어나다니. 나는 대체 언제쯤 철이 들려나. 몸을 일으키려는데 침대에 붙은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위에 한 번도 눌려본 적 없지만,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 짓인 게, 그날 나는 원래 오전 8시 버스를 예매했다.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어 두 시간을 미루었고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출근도 그렇게 안 하는데 무슨. 나이도 있는데 노는 데 목숨 걸다가 진짜 황천 가지 말자고 다짐하며 짐을 꾸렸다.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그제야 검색을 시작했다. 어라 젠장, 속초에 버스터미널이 두 개였네? 그렇다. 속초에는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다. 둘의 차이가 뭔지 여전히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계획은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근처 이마트에서 장을 본 후 택시로 숙소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예매한 티켓은 시외버스터미널행이었다! 뒷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내가 도착할 곳은 이마트 옆 고속버스터미널이 아닌 허허벌판 시내 한복판의 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어쩐지 자리가 널널하게 남은 게 이상하더라. 이제 와서 티켓을 또 바꾸는 것도, 서울에서 출발하는 터미널까지 한참을 더 가야 한다는 것도 3시간밖에 못 잔 나에게는 너무 귀찮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별로 안 멀어 보이는데. 날씨 봐서 걸어가지, 뭐.'      


2시간 남짓 버스가 달릴 동안 나는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속초였다. 혹시 침을 흘렸나 마스크를 슬쩍 확인해본 후 가장 마지막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역시나 주변에 뭐가 없었다. 남동생이 어느 에어비앤비 사장에게 받았다는 속초 맛집 리스트를 보내줬는데, 스크롤을 한참 내리다가 포기했다. 먹는 데 딱히 욕망이 없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메뉴 고르는 것도 일이다. 그리고 너무 더웠다. 공식적으로는 장마 기간이었지만, 전날부터 해가 쨍쨍했던 터라 금방이라도 녹을 것 같았다. 나는 지도 앱에서 검색한 터미널 근방의 한 국숫집으로 향했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좀 걷다 보니 국숫집이 나왔다. 메뉴는 다섯 가지 정도였고, 모두 국수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국수 장인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행히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어서 얼른 앉았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열무국수를 골랐는데, 여름이니까 계절메뉴를 먹겠다는 야무진 생각에서였다. 할머니가 혼자 주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으시기에 직접 주방으로 갔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콩국수를 시킨 모양인지 믹서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주문 그냥 말씀드리면 돼요?"

"으응?"

믹서 소리가 내 목소리를 죄다 집어삼켰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얼른 믹서를 멈추었다.

"저 열무국수 하나 주세요."

"그래요. 앉아 있어. 아유, 예쁘기도 하네."

"아하하,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와 슬쩍 사람 구경을 했다. 가게의 손님들은 다들 50대 이상이었고, 여행자 티를 폴폴 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동네 맛집인가 보다 생각하며 잠시 땀을 식혔다. 앞뒤로 열어둔 출입문으로 바람길이 나서 에어컨 없이도 꽤 시원했다. 옆 테이블의 콩국수가 나오고, 얼마 후 내 열무국수도 나왔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요. 참 예쁘네."

예쁘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내가 객관적으로 예뻐서 그렇게 말씀한 건 아니다) 민망했지만 그 다정함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어르신들 눈에 젊은이들은 다 예뻐 보이나 보다. 하긴, 나도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보며 가끔 비슷한 생각을 하곤 한다. 칭찬에 약한 나는 잠시 입꼬리 내릴 시간을 갖기 위해 마스크를 낀 채 열무국수 사진을 찍었다. 음식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이지만, 나중에 또 뭘 먹었는지 기억 못 하면 곤란하니까. 음식 사진은 한두 장이면 족하니 이제 먹어야지. 하얀 국수와 잘 익은 열무를 한 입 가득 집어넣었다. 코 끝에 알싸함이 퍼졌다. 여름 맛이었다.



잘 먹고 나니 머리가 좀 돌아가기 시작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고, 나는 번잡한 주말 속초 시내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트에서 미리 장을 보고 그걸 든 채 반나절을 돌아다니기도 곤란했다. 편의점이나 근처에서 사 먹지 뭐, 별 수 있나. 금세 장보기를 포기한 나는 대신 카페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숙소에서 별로 멀지 않은 아야진 해변을 구경할 겸 그 근처 아무 카페나 가야겠다 생각한 나는 지도 앱을 켰다. 어디 보자, 여기서 걸으면 얼마나 걸리려나. 히익, 도보로 2시간 반. 하지만 해안가를 따라 걷는 거라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경치는 좋겠네... 한번 걸어가 볼까?


그날 속초의 날씨는 말 그대로 찜통이었다.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은 날이었다) 두 세 골목 정도 걸었을 뿐인데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육성으로 덥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악명 높은 대프리카,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덥다고 하면 진짜 더운 거다.

'와... 장마기간에 비가 안 온다는 건 그냥 구름이 좀 많다, 이 정도여야 되는 거 아니냐? 날씨 진짜 양심 없네.'

7월이 이 정도인데 다가올 8월은 어떻게 날지 걱정되었다. 이번 생에 까딱하면 지구 종말을 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대로 계속 걸어가다가는 내 생명도 종말 할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택시 앱을 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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