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에 숨어 엄마와 대화하기
비즈니스 관계에서 날씨 이야기는 중요하다. 스몰토크라고도 하고, 아이스브레이킹 한다고도 표현한다. 업무 상뿐만이 아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할 때 우리는 날씨를 끌고 온다. 나한테 잘해주지만 속 이야기는 터놓지 못하는 선배와 커피를 마실 때, 잘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잘해주는지 잘 모르겠는 후배와 인사할 때 “와- 오늘 너무 춥다. 그치”는 좋은 대화의 스타트이다.
나는 주로 집에서 날씨 이야기를 한다. 가끔은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침대에 누울 때까지, 다른 어떤 주제 없이 날씨 이야기만 하기도 한다. 집 밖에서는 1일 차 썸남까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나인데, 엄마한테는 춥다, 덥다, 쌀쌀하다. 뿐이 말을 안 하는 기상캐스터가 된다. 왜 나는 다른 무엇도 아닌 매일 일어나는 흔하디 흔한 자연현상을 주제로만 집에서 대화를 하게 되었을까.
공감을 받고자 던진 말이 여러 해에 걸쳐 어떤 비교와 멸시로 축적된다면, 당신은 대화할 용기를 갖기 쉽지 않다. 내 경우였다. 내가 은지 만나러 홍대 가요, 라고 하면 엄마는, 그 친구는 어디 취업해서 잘 살고 있다던데 너는 뭐니. 라고 말했다. 오늘 20년 지기 친구 브라이덜 샤워하러 가요, 라고 하면, 너는 얼굴이 예쁘지도 않은데 직장이라도 잘 구해서 시집가야지. 라는 구박으로 돌아왔다. 물론 엄마의 말이 백 프로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 엄마 사랑받으면서 바르게 잘 자랐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우리 대화의 칠 할은 이런 뒤틀린 형태였고,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엄마라는 필터를 거쳐 내 자존심을 갉아먹는 칼이 되어 돌아왔다.
이런 실패의 경험들로, 나는 입을 닫고 ‘내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친구를 만나서, 무엇을 먹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고, 최근에 나에게 생긴 고민은 무엇인지에 대해 함구했다. 그래도 같은 천장 아래 살고 있는 가족이니까, 그래도 엄마는 좋으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딸이 되고 싶으니까 말을 하긴 했는데, 주로 그 주제는 날씨였다. 날씨는 좋은 연막이었다. 부모님과 물리적으로 대화란 행위를 하면서도 불편하고 열 받는 ‘잔소리’들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잔소리라고 하였으나, ‘잔’소리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바늘같이 날카로운 소리들이었다.) 날씨 얘기를 하면, 난 그 무의미한 말의 옮김들에 숨어, 진짜 내 얘기는 하지 않고도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엄마에게 ‘오늘의 회사 이야기’가 아닌 ‘회사 가는 길의 날씨 이야기’를 하고 혼자 밥을 조용히 씹어 넘기다 보면,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든다. 딸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라던데, 나도 엄마랑 맛집이랑 카페 다니면서 사진 찍으면서 데이트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기도 한다. 그래서 과거를 까먹고, 가끔은 바보같이 용기를 가지고 또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해보기도 한다. 부모님과 즐거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할 때는, 내가 저번에 친구 결혼식에 갔는데. 로 대화를 시작해보기도 한다. 엄마 아빠는 알까, 내가 친구 만난다는 이 간단한 말을 꺼내면서도, 얘기를 할까 말까 열 번은 속으로 고민한다는 걸.
엄마와 친한 친구 사이는 못될 것이다. 엄마는 내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 주는 친구가 아니라, 좋은 대학/좋은 직장 가져서 편하게 살라고 채찍질하는 선생님에 가까웠다. 수십 년 간 이런 관계였으면, 앞으로도 이럴 것이다. 나는 지금처럼 시간을 때우는 날씨 이야기만 하다가, 가끔 내 얘기를 하고, 자주 좌절되지만 까먹고 나중에 또 내 얘기를 하며 진짜 대화를 시도해보며, 그렇게 살 것이다.
시월이고, 단풍이 예쁘다. 내일은 단풍 이야기를 하고, 요즘 회사 다니기가 너무 싫고 힘들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