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책_겨울] 열 번째 이야기
하루키가 바꾼 나의 인생 <상실의 시대>
"이 책 한 번 읽어봐, 재미있어!"
수능을 마치고 한가하던 시절, 친구가 책을 건네줬다. 책 이름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한량처럼 지내던 시절이라 집에 돌아와 아무런 할 일이 없어 책을 손에 쥐었다. 사람인지 유령인지 모를 실루엣이 하얗게 그려진 표지. 표지는 나에게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지만, 책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을 넘기고 한 장 한 장 읽어가다가 어느새 꼴딱 밤을 새웠다. 충격적이었다. 내가 책을 밤을 새워서 읽었다는 게 첫 번째 충격이었고,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는 게 두 번째 충격이었다. 그때 막연히 일본어를 배워서 원서를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야구장에서 하늘 위로 날아가는 야구공을 보며 '소설가가 되어야지'라고 다짐했던 것처럼.
그 이후로 대학교에 들어가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동안 나는 책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대학교 첫 1년 동안은 처음 해보는 캠퍼스 생활에 들떠 있었고, 선배들을 따라 여기저기 술을 마시러 다니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1학년은 정신없이 지나갔고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대학 생활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전공이지만 막상 대학교에 와서 공부해보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재미있는 공부를 해보고 싶었으나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찾은 건 대학교 도서관. 예전부터 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다독가는 아니었다. 그나마 중학교 때까지는 1년에 10권이라도 읽었지만,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입시에 치여 1년에 1권도 못 읽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발견했고, 나는 과거의 나와 조우하였다. 그리고 하루키 책을 미친 듯이 읽어 나갔다.
하루키의 책을 읽는 동안 일본어에 대한 사랑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처음으로 내가 재미있는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 소설을 보고, 일본 드라마를 보고, 일본 영화를 보고, 일본 예능을 찾아봤다. 혼자 일본어 교재를 사서 공부를 해보고, 일본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도 적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본어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한 것 같다. 대학교 수업 이외에는 딱히 할 일도 없던 때라 학교 수업 시간 이외에는 일본어 공부만 했다. 2학년을 마치고는 휴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했고, 일본으로 여행을 가서 실제로 일본어를 써보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있었다. 종일 일본어 공부만 하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 말이 일본어로 들리기도 하고, 꿈에서 일본어를 쓰기도 했다.
일본어를 배우다 보니 일본에서 살고 싶어졌다. 대학교 교환학생을 신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도 미안했다. 내가 번 돈으로 일본에서 살고자 마음먹었고, 그렇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다. 기회는 취직 후 1년 뒤에 찾아왔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고자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회사 제휴사인 일본 회사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워킹 홀리데이 출국일이 12월이었고 직원은 1월부터 필요하다고 하여 서류를 제출했고 12월에 일본에 입국하면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렇게 나의 일본 생활은 시작되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서 일본 생활을 하기까지. 나는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치열한 시기를 보냈다. 일본어를 독학으로 잘 배운 기억으로 언어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무엇보다 나는 어떤 일이든지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생겼다. 그 이후로 나의 자존감이 높아졌고 인생에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도전하며 즐겁게 살아왔다. 딱히 내세울 특기가 없었던 나에게 '일본어'라는 강력한 특기를 만들어주었고, 아직 그때 배운 일본어를 잘 쓰고 있다.
사실 수능이 끝나고 나에게 책을 빌려준 친구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난다면 연락해서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말이다. 도통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난다. <상실의 시대> 책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르웨이 숲에서 가만히 서 있는 외로운 소년의 모습만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다시 읽어볼까도 여러 번 생각했지만, 내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겨진 이미지가 좋아서 아직 읽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상실의 시대> 책을 주문했다. 그 사이 책 제목도 <노르웨이의 숲>으로 바뀌었고, 표지도 세련되게 바뀌었더라. 다시 읽은 마음이 생긴 건 단 하나, 그때의 내 열정을 다시 찾고 싶어서이다. 처음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가 내 인생의 번째 터닝포인트라면 이제 두 번째 읽어서 번째 터닝포인트를 만들고 싶다.
하,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세상에서 제일 기다리기 힘든 시간이다.
책을 기다리며,
두 번째 터닝포인트를 기다리며 글을 마친다.
(에필로그)
'내 인생의 책'이란 주제로 글을 쓴 게 이걸로 3번째이다.
같은 내용을 3번이나 썼다는 이야기인데, 쓸 때마다 새롭고 쓸 때마다 즐겁다.
그건 아마도 내가 그 시절에 좋아하는 일을 치열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그 일을 글로 쓰는 건 더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