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하루키
대학교 마지막 여름방학,
나는 혼자 필리핀 마닐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대학교에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방학이라고 생각하니 어디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친한 친구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살다가 잠깐 한국에 들어왔고, 필리핀에 다시 돌아가는 날에 맞춰 함께 마닐라에 가기로 했다.
당시 나는 일본문학에 빠져있었고, 하루키를 불타게 짝사랑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내 손에는 하루키나 다른 일본 작가의 소설책이 들려 있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매일 같이 책을 빌려 읽었고, 그것이 당시 나의 삶의 전부였다. 여행을 가도 당연히 책 한 권쯤을 들고 가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친구와 같은 날 가기로 했지만 친구와 나는 다른 비행기를 예약했다. 친구는 편도로, 나는 왕복으로. 탑승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친구를 기다리며 왠지 한 번쯤은 인천공항에서 책을 골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인천공항 서점에 들렀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골랐다. 친구를 만나 입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에 들렸다가 각자의 마닐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처음으로 혼자 타는 비행기. 설렘과 약간의 긴장이 섞인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1986년 하루키 나이 38살.
하루키는 지쳐 있었고 마흔이 곧 다가올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루키는 멀리서 들려오는 먼 북소리에 이끌려 유럽으로 3년의 긴 여행을 떠났다. 당시 나는 어딘가에서 들려온 정체 모를 소리에 3년 동안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하루키의 삶을 부러워하다 못해 동경하고 있었다. 『먼 북소리』는 3년 동안 하루키가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생활하면서 쓴 에세이를 모은 에세이집이다. 하루키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노르웨이의 숲』, 『댄스 댄스 댄스』 등이 이 시기에 탄생했고, 먼 북소리는 하루키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아 책에 푹 빠져 있는데 읽고 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훅 바뀌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이야기가 도통 이어지지 않아 의아해했다. 그러다 발견했다. 페이지의 숫자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책은 중간에 20 페이지 정도가 없었다. 정확한 페이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124페이지에서 바로 144페이지가 되는 식이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비행기 안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당장 이북이라도 구매해서 읽어보겠으나 그 때는 이북이 없던 시절이었고 스마트폰이 아닌 전화와 문자 기능만 되는 핸드폰만 있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헛헛. 이를 어쩌지 하고 있는데 내 귀에 영어문장이 꽂혔다.
"Does anyone have a book?"
난 손에 들고 있던 '먼 북소리'를 번쩍 들었다.
"Here!"
내가 탄 비행기는 세부 퍼시픽이었는데 기내 행사로 게임을 하고 있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지품 중 승무원이 말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선물을 주었다. 비행기에서 유일하게 나만 책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세부 퍼시픽 비행기 캐릭터가 귀엽게 그려진 방수팩과 비치볼, 그림을 지웠다가 다시 그릴 수 있는 그림판을 받았다. 한 눈에 봐도 어린이를 위한 선물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난 그 선물을 그 이후로 결혼할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다가 신혼집으로 이사갈 때나 되어서야 겨우 버렸다.
책의 20 페이지 정도가 없는 것은 어이 없었지만, 그 책으로 선물을 받게 되니 기분이 묘하게 기뻤다. 선물을 받고 잠시 기쁨을 누리고 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에세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 그렇게 통째로 사라졌다면 난 비행기를 당장 내려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사실 소심한 성격이라 그렇게 하진 못하지만) 그 때까지 유럽여행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나는 마치 유럽에 하루키와 같이 여행을 간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20 페이지를 읽진 못 했지만 마닐라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책을 다 읽었다.
서울로 오자마자 출판사에 연락을 했고, 출판사는 죄송하다며 새 책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나는 20페이지가 사라진 『먼 북소리』와 완벽히 모든 페이지가 있는 『먼 북소리』, 2권을 가지게 되었다. 완벽한 책을 받자마자 '잃어버린 20페이지'를 찾아 숨가쁘게 읽어 나갔다. '잃어버린 20페이지'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였고, 조금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해 후회했던 것들이 결국 이렇게 가지고 보면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잃어버린 채로 책을 끝까지 읽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떠한 상실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당시에 한 건 아니고 지금에서야 해봤다.
사실 당시 나는 마지막 대학교 여름방학을 즐기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누군가를 잊기 위해 여행을 선택했었다. 여행 내내 생각이 나고 돌아와서도 잊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시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니 어쩌면 '잃어버린 20페이지'가 그 누군가와의 추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미처 가지지 못했던 추억을 안고 나는 앞으로 나아갔고 지금에 이르렀다. 지나간 20페이지에 연연치 않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겠지.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책이 읽고 싶어져서 집을 찾았지만 책은 나오지 않았다. 좀처럼 책을 버리지 않는 나이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중학교 때 산 책, 고등학교 때 산 책은 있어도 그 책만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떠오른 게 누군가 장기간 여행을 간다고 해서 그 책을 선물로 준 것이 생각났다. 물론 완벽한 한 권을 말이다. 그런데 잃어버린 20페이지의 그 책은 어디로 간거지? 이제는 페이지가 아니라 책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이건 정말 『먼 북소리』의 '상실의 시대'이다. 그래도 괜찮다. 책은 또 사면 되고, 추억은 내 안에 그대로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