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사랑하는 법
할머니와 나는 앙숙이었다.
할머니는 늘 나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돌아다니는 것에 화가 나 있으셨고, 나는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하는 것에 늘 짜증이 나 있었다. 할머니의 입에서는 늘 "그놈의 머리칼" 이라는 말이 나왔고,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할머니는 집안의 모든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늘 말을 험하게 하셨고 항상 화를 내셨다. 특히 엄마에게는 더 심했다. 엄마는 꾹 참다가 어느날 가시 돋힌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아빠는 늘 화를 내는 할머니를 말리다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늘 엄마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생선구이 반찬을 식탁에 올리셨고, 아빠는 깨끗한 걸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매일 집 안을 깨끗이 정리하셨다. 주말에는 늘 대청소를 하셨고, 나는 모든 집들이 주말에는 대청소를 하는 것이라고 굳게 생각하며 자랐다. 자라고 보니 그렇게 깨끗하게 집을 정리정돈하는 가정은 많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멋쟁이였다.
남들은 다 입는 꽃무늬 자켓이나 꽃무늬 바지 같은 건 없었다. 할머니의 옷장에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하지만 고급스러운 색감의 옷들이 가득 있었다. 특히 할머니가 자주 입었던 은은한 연보라색 자켓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아끼던 옷이었는지 외출을 할 때 그 자켓을 즐겨 입곤 하셨다. 할머니의 미적 감각이 뛰어난 덕분이었는지 고모는 미술에 재능을 보이셨고, 우리 언니도 미술에 재능을 보여 미대를 가기도 했다.
어린시절 내 사진에는 모두 할머니가 계셨다.
유치원의 행사 사진에도, 초등학교 소풍 사진에도. 어린시절 엄마는 늘 바빴다. 일하고 돌아오면 집안일을 하셨고, 매일 아침 출근하기 바쁘셨다.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가 늘 나의 행사를 챙기셨다. 젊고 예쁜 엄마들과 함께 소풍에 온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소풍 때 만큼은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진 속 내 얼굴은 늘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 말이다.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늘 담배를 피우시면서도 건강하셨다. 나이가 들어서도 큰 병 하나 없으셨고 늘 여기저기 돌아다니셨다. 그러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식 동안 부지런히 음식을 배달하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돌아가신지 삼일 째 되던 날, 할머니가 입관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쓰려졌었고, 몇 시간이 지나 깨어났다. 뭔가 모를 슬픔이 있었지만 그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첫 아이를 낳고 할머니가 2번 꿈에 나온 적이 있다.
산후조리원에서 한 번, 집에서 한 번. 할머니는 나에게 밥을 잘 챙겨먹으라며 어여 일어나서 밥을 먹으라고 했고, 나는 깨어났다. 엄마에게 그 말을 하니 엄마는 할머니가 나를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예뻐했고 그래서 아이를 낳아 기특해서 챙겨주려고 꿈에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 할머니가 나를 미워하는 줄만 알았다. 매일 나에게 잔소리만 하던 할머니가 나를 가장 예뻐했더니...
생각해보면 그게 할머니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늘 나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가족들에게 뭐라고 한 소리를 하는 게 할머니의 사랑 표현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할머니는 무한한 관심을 표현하며 잔소리라는 이름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독 나에게 잔소리가 심하셨나보다.
어느덧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 가까이 되었다.
어느덧 우리 엄마도 할머니가 되었다. 아이는 늘 엄마에게 '할머니~' 라고 하면서 좋아하면서 안긴다. 가끔 명절 때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할머니를 생각한다. 아마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주변 사람에게 늘 화를 내면서 잔소리를 하면서 지내실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늘 표현하시면서.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 그 사랑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당신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는 잘 커서 부모가 되었고, 당신의 사랑 덕분에 잘 살고 있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할머니, 하늘나라에서 언제나 건강하세요.
잔소리는 조금만 줄이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