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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리Rhee Oct 31. 2023

달님을 증인 삼아

회사에서 진급을 목전에 두고 새벽반 영어 회화 학원에 등록했다. 새벽 반 영어회화 시간을 마치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느라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취업한 것 같은 한 청년이 다가와서 내게 인사를 건넨다. "하이! 루씨!" 얼굴이 말갛고, 꾸밈없는 스포츠머리에다가, 눈빛이 반짝이는 남자였다. 새벽에 잠도 덜 깼는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나는 버스를 잡아 타고 회사로 향했다. 그날부터였을까, 새벽반 영어 학원을 마치고 회사로 향하는 버스 타는 정류장에서 그를 자주 만나게 되었고, 내게 명함을 달라고 하루는 이야길 했다. 별 사람을 다 보겠다며, 억지로 명함을 한 장 마지못해 건네줬다. 나는 원하는 영어 점수를 따게 됐고, 그렇게 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이 지루한 오후 시간은 언제 6시를 가리키고 나는 집으로 향할 수 있을까?'  하염없이 시계만 쳐다보던 어느 날 사무실에서의 오후였다. 조용한 정적을 깨고 내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려대서,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 편 건너로 들려오는 활발한 목소리. "루씨! 저예요! 잘 지냈어요?", 누가 들을까 싶어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다고 하고 끊어버렸다. 학원에서 만났던 그 청년이었다. 나랑 이야기를 뭐 얼마나 해봤다고, 전화를 거나 싶었고, 심지어 무례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에게 매정하게 끊긴 수화기는 곧바로 다시 울려댔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끊어버렸다. 그렇게 꽃피는 봄에 한 청년은 말 한마디 섞고 싶은 새침데기 학원 친구에게 매정하게 전화 연결조차 거절당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한참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이었는데, 그는 팥빙수 한 그릇 먹고 힘내라는 문자를 내게 보내왔다. 사실 그 문자는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보내는 단체 '스팸'성 문자였다. 그런데, 나는 왠지 모르게 너무 무안하게 전화를 끊어버린데 대한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 스팸문자에 미안함을 원동력 삼아, 나는 '말만 하지 말고 와서 팥빙수를 사라.'라는 핀잔 섞인 답문을 넣게 됐다. 그렇게 우리는 첫 만남을 갖게 됐다.


나의 사무실 앞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한 저녁에, 그는 전화기 너머 쾌활함을 그대로 싣고 나타났다. "루씨! 저예요! 잘 지냈어요?" 지루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사무실 생활에 지쳐있던 나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마른 화단에 물을 주듯, 나의 메마른 신경을 촉촉하게 하였다. 그와 나는 주문한 음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눴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내가 이야기를 듣는 쪽이 되었다. 그의 첫마디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였다. 신선했다. 자기를 스스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소개하다니. 그렇게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무려 3시간이나 지속됐다. 화장실을 갈 틈도 주지 않았다. 자기를 소개하기 위해서 파워포인트 자료도 들고 나왔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말갛게만 보였던 고등학생 같았던 청년이 내 앞에서 열정적인 남자로 변해있었다. 내 마음 안에 있던 메말랐던 연애 장작들에 불쏘시개가 당겨진 기분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사랑에 빠졌다. 하늘에 떠 가는 구름만 보아도, 그가 웃고 있었고, 눈 부신 태양아래 투명하게 비치는 나뭇잎에도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길에 지나가는 낯선 행인조차도, 그와 비슷한 체격이면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곤 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같이 먹고 싶었고, 예쁜 옷이 보이면 사다가 선물해 주고 싶었다. 온 세상이 핑크 빛이었고, 언제나 전화기만 쳐다보며 그에게 올 연락에 항상 들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이었는지, 세 번째 만남이었는지, 그와 한강고수부지를 산책을 하게 됐다. 저녁을 먹고 난 뒤였는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와 함께 길을 걷는다는 자체가 내겐 행복함이었으니까. 한강변을 따라 걷던 그가 문득 "저 루씨랑 결혼할 겁니다. 우리 결혼합시다!" 이런 추진감가 박력 넘치는 남자를 나는 내 20 평생 바라왔었고, 나의 평생소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네! 좋아요!" 우리는 그날 저녁 하늘에 동그랗게 떠 있는 달님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그리고 대기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가을 저녁을 증인 삼아 서로의 미래를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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