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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리Rhee Oct 20. 2023

흥정하는 방법

우리 엄마의 글로벌 흥정기

열 살 무렵 나는 정원이 딸린 널따란 2층 주택에서 살았다. 나랑 같은 반 남자아이가 담장 너머에 매달려 우리 집의 정원을 훔쳐보며 "야! 너희 집 부자이구나!!" 라며 외칠 만큼 그 동네에서는 우리 집이 꽤 큰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 집은 겨울엔 너무나 추워서 오리털 파카를 뒤집어쓰고 양말을 신은채, 나와 남동생 엄마 아빠가 같이 꼭 붙어서 자야 했다. 엄마가 결혼할 때 해왔을 법한 두툼한 목화솜을 튼, 한복에 덧대어진 색동저고리 같은 알록달록한 수가 놓인 이불을 덮으면 이불이 너무나 차가워서 그 안에서 두 발을 한참이나 비벼댔던 기억에 지금도 발이 시린 것만 같다. 겨울에는 연탄을 땠는데, 새벽에 연탄이 다 타서 꺼져버리기 때문에, 잠을 자기 직전에 꼭 연탄을 갈아야 했다. 엄마 아빠는 추운 겨울 바깥에 나가는 게 너무나 싫었는지, 둘이서 항상 가위바위보를 하였고, 이상하게 꼭 아빠가 졌다. 엄마와 가위바위보에서 진 아빠는 나를 바라보며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내어, 하는 수 없이 연탄을 갈러가는 아빠 옆을 나는 지켰다. 아빠가 연탄을 가는 동안 나는 눈알이 땡글한 까만 눈빛의 생쥐들과 인사도 나누고, 낮에 동네 아이들과 열심히 딱지치기하여 따낸 딱지들도 꺼내어 뿌듯함을 만끽하곤 했다. 


우리 엄마는 부잣집 막내딸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고이 자라서, 아주 마음씨가 바다와 같이 널따란 장남 아빠에게 시집왔다. 나중에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매쟁이 할머니가 아빠네는 산도 많고 땅도 많고 부자라고 우리 외할머니를 꼬드겼는데, 시집와서 보니 다 뻥이었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팍팍한 아빠의 월급을 쪼개어서 퍽이나 야무지게 살림을 살아내셨다. 집에 쌓인 폐지를 잔뜩 쌓아뒀다가 뻥튀기 아저씨에게 바꿔오곤 했다. 그 뻥튀기의 고소함은 아직도 나의 혀끝을 자극하는 듯하다. 


우리 엄마는 시장에 가서도 콩나물 파는 아주머니와 100월 200원의 흥정을 아주 열심히 하셨다. 콩나물 파는 아주머니의 흘겨보는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엄마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가격대의 돈을 던지듯 쥐어드리고 엄마가 원하는 물건을 가져오곤 하셨다. 엄마의 신출내기 같은 가격 깎는 기술은 글로벌하게도 모두 통용이 됐는데, 이 팁을 알려드리면 독자께서는 어딜 가나 바가지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나중에 대학교 진학 한 뒤, 중국 패키지여행을 갔을 때 이야기인데, 우리 엄마는 커다란 항아리 같은 단지에 알록달록 홍색 청색의 칠이 된 물건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아마도 그때 당시 중국 상인은 우리 엄마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가격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힘차게 외친 것 같다. "600원!" 그러자 우리 엄마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200원!"이라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나는 정말 옆에서 어처구니없는 가격이라고 생각하고는 버스 돌아갈 시간이 됐나 안 됐나 시계만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중국인 상인은 "500원!"을 외쳤다. 이쯤 되면, 나는 엄마가 350원이나 400원을 부르고 합의하에 가격을 지불하고 버스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결의에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가격을 제시하였다. "150원". 이제는 큰일이다, 가이드 아저씨가 마지막 버스 미 탑승자인 우리를 찾아 상점 안에까지 들어와 계셨다. 엄마는 버스를 놓치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듯 보였고, 지금 이 순간은 항아리인지 단지인지 용도 모를 알록달록한 이 물건을 엄마가 원하는 가격에 손에 넣는 것만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중국인 상인은 그 단지를 아마도 우리 엄마의 단호한 의지에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200원!"을 불렀고, 엄마는 그 두 단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두 개 중 한 개를 옆구리에 끼워 들고는 버스에 다른 관광객들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스로 몸을 실었다. 그 두 개의 단지는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직도 엄마 집의 거실 한편을 차지하며 위엄을 뽐내고 있다. 


중학교 시절이었을까, 여름여행으로 가족끼리 캐나다 여행을 떠났다. 아빠의 자유여행 패키지 일정을 따라 열심히 아빠 뒷 꽁무니만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그리고 캐나다인지 미 서부인지 어딘지 모른 채, 길고 긴 road trip에 나는 잠만 자느라 전체적으로 하늘 저 끝부터 떨어지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끝없는 돌벽만 세워져 있던 그랜드캐년정도만 머리에 남는 여행이었던 것 같다. 점심때인가, 우리 가족은  햄버거를 먹으러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나보고 직접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해 보라는 아빠의 말에 가슴이 어찌 나도 뛰던지, 제일 간단한 기본 햄버거의 발음을 열 번 넘게 연습하고 "취즈 햄벌거?"를 말하고 얼굴이 새 빨개져서 아빠 뒤로 숨었다. 그렇게 내 남동생도 직접 주문을 하게 하였던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린 주문한 햄버거를 받아 들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아빠가 "어, 잔돈이 모자라는 것 같은데?" 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셨다. 우리 가족은 뭐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냥 햄버거를 먹자고 했는데, 옆에서 엄마는 "기다려봐! 내가 다녀올게!" 라며 계산대로 걸어갔다. 나는 속으로 '엄마가 그 복잡한 영어를 어떻게 설명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며 햄버거를 오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만면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 엄마가 모자란 잔돈을 받아온 거다! 우리 가족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엄마 어떻게 하신 거예요? 엄마 영어로 다 설명한 거예요?" 그러자, 엄마는 계산서를 점원에게 내밀며 단지 두 단어만 말씀하셨다고 했다. "I! THINK!..." 그러자, 계산원이 알아서 부족한 잔돈을 거슬러줬다고 하는데, 역시 엄마의 돈에 대한 위풍당당함은 세계만국 공통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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