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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순 May 11. 2022

말의 사진

2012년 11월에 쓴 글

 저는 찌질합니다. 취미가 찌질합니다. 카피라이터라는 놈이 크리에이터라는 것이, 폼나는 라이딩도 트렌디한 명품쇼핑도 모자랄 판국에, 기껏 좋아한다는 게 필사(筆寫)입니다. 옮겨 적고 베껴 적는 따위에 필사적이란 말입니다. 소설이나 시, 산문, 평론의 인상적인 한 줄도, 영화나 드라마, 만화의 대사 한 마디도, 인터넷 신문의 베스트 댓글도, 길거리 취객의 옹알이 같은 술주정도, 다섯 살 아들녀석의 따끔한 훈계도, 아주 가끔 혼잣말도 이거다 싶으면 적습니다. 멋들어진 말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사실 멋들어진 말이 아닐수록 좋습니다. 그 순간 저를 멈칫하게 만든 말이라면 주저 없이 베낍니다. 그리고 종종 들춰보는 게 저의 재미입니다.   


 어쩌면 저에게 ‘필사’란 ‘말의 사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찰칵찰칵 찰나의 이미지를 붙잡듯, 찰나의 말을 붙잡고 싶은 게 욕심입니다. 그래서 되도록 제 생각을 더하지 않고 최대한 그 말 그대로를 글자로 옮기려 노력합니다. ‘박제’ 보다 ‘생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살아 펄떡이는 활어(活語) 한 마리 공책이나 노트북 속에 풀어 놓을 때면, 아쿠아리움에 처음 간 아이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합니다. 혹자는 이러한 취미의 영향으로 대단한 카피 한 줄 남기지 않았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딱히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못나디 못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십 년을 카피라이터로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어쩌면 기적 같고 어쩌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대행사 표류기는 필사라는 취미가 없었다면 버텨낼 수 없었을 겁니다.    


  ‘필사’는 사진을 찍으러 나가는 ‘출사’와도 같습니다. 사진 찍기에 재미를 붙이면 일상적인 이미지도 새롭게 보인다고 하지요. 필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흘려듣던 말도 새롭게 들리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면 슬슬 새로운 말이 궁금해지고, 자연스레 말을 찾게 됩니다. 누군가의 말이 궁금하면, 필사는 그에게 말을 건네게 만듭니다. 누군가의 생각이 궁금하면, 필사는 그의 책을 펼치게 만듭니다. 구석에 웅그리고 베껴 적는 받아쓰기의 재미가 필사의 전부는 아닙니다. 궁금한 말과 글과 생각을 찾아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 말로 필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쓰고 나니 찌질한 취미에 대한 찌질한 변명 같아 부끄러워지지만, 그래도 저는 필사를 좋아합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를 좋아하고, 누군가의 ‘남다른’ 생각 혹은 누군가의 ‘나 같은’ 생각을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글로 사진을 찍고, 출사 나가듯 필사를 나갈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 찌질하고 알 수 없는 속내마저도 있는 그대로 필사할 순간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나를 온전히 글로 찍는다. 이런 건 ‘셀사(셀프 필사)’라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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