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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Dec 10. 2022

고통에 대하여 1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3)

수업을 듣고 나니 내가 왜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답은 내가 과거에 마주쳤던 것들의 배치와 구조에 있었다. 건강염려증이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해서, 아주 사소한 이상신호가 있어도 과하게 반응하는 증상을 일컫는다. 우리 부모님은 중증 건강염려증자셨다. 그랬을 법도 했다. 우리 엄마는 체질적으로 약한 몸을 타고 났기 때문이었다. 이러저러한 역사 때문에, 나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과잉보호 하에 키우셨다. 금쪽같은 자식들 무서운 세상에 내놓기 두려우셨을게 당연하다. 아침 뉴스만 틀어도 흉흉한 소식들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나는 자식을 낳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 마음으로 오래도록 부모님의 과잉보호를 이해하려고 했다. 과잉보호가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의 방식은 다른 부모님들의 그것과 달랐다. 부모님은 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나에게서 고통을 금지했다. 내가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야할 결정적인 시기에 부모님은 나 대신에 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싶어 하셨다. 부끄러운 고백을 한 개 더 해야겠다. 현역 때 수능을 망쳤다. 나는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 때 엄마가 수능 원서를 나 대신에 써 줬다. 내가 골방에 틀어박혀서 매일 밤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고 게임이나 하면서 히키코모리가 되어가고 있을 때, 엄마는 머리를 싸매고 밤낮으로 내 수능 성적으로 최대한 높이 쓸 수 있는 학교와 학과를 샅샅히 뒤졌다. 그래서 나는 그 성적으로도 추가합격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스스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와 고통을 엄마가 대신 짊어져 준 셈이었다. 


그렇게 몸은 스무살 성인이지만 정신은 유치원생인 상태로 세상에 나와야만 했다. 고통이 금지된,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에 나오니 죽을 맛이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세상에는 온통 혼자서 해야만 하는 것들 천지였다. 매일매일이 불안했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다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타자들이 가득한 세상에 나와보니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타인은 지옥이었다. 어찌저찌 타자들과 관계를 맺어보려 하다가도 번번히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관계로 끝났다. 몇 번의 풋풋한 연애도 거쳤지만, 연애가 끝나고 나면 남는 감정은 사랑의 충만함이 아니라 "나쁜 놈. 이제 다시 사랑안해!" 하는 피해의식과 증오였다. 나만 상처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세상과 타자는 나를 더욱 더 완전하게 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파괴하고 불완전하게 해 주는 존재들이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고통은 국지적 노력이며, 노력의 그런 고립 자체가 그 무기력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그 부분들과의 유대 때문에 전체의 결과 이외에는 더 이상 적절하게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노력이 국지적이기 때문에 고통은 생명체가 겪는 위험과는 절대적으로 불균등하다. 즉, 위험은 치명적인데 고통은 가볍고, 고통은 감내할 수 없을 정도 (치통과 같이)이나 위험은 사소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이 개입하는 정확한 순간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유기체의 관계된 부분 (손상된 부분)이 자극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거부할 때이다. 그리고 지각과 정조 (감정)을 가르는 것은 정도의 차이뿐만 아니라 본성의 차이이다." <물질과 기억> 105 p,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의 고통에 대한 관점이 흥미로웠다. 그는 고통이란 특정 감각기관의 국지적 노력이며, 국지적이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부분들 및 유기체의 중심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뜨거운 물체를 손을 집는다고 가정했을 때, 손은 일종의 수색대의 자격으로 신체 전체에 앞서서 그 물체를 탐색하게 된다. 손이 뜨거움을 느끼면 우리의 몸은 어떻게 반응할까? 뜨거움이 손이라는 감각신경을 통해 유기체의 중심에 전달되면 유기체는 그 자극을 분석하고 판단한다. 뜨거움이 유기체의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라면 운동신경에 손을 떼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를 받고 손은 뜨거운 물체에서 떨어지게 된다. 반면 뜨거움이 유기체의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가 아니라면 손을 떼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그러면 손은 뜨거움을 느낄 뿐 물체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자극 자체에 대해서 선발대로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루는 주체는 다름 아닌 손이라는 국지적인 기관이다. 자극을 받아들여 해석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국지적 노력의 과정을 베르그손은 '고통'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은 국지적이기 때문에 생명체가 겪는 위험과는 절대적으로 불균등하다고 했다. 위험은 치명적인데 고통은 가벼울 수 있고 반대로 고통은 어마어마하지만 위험은 사소한 것일수도 있다. '위험하다', '위험하지 않다'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철학자 스피노자가 이야기 하는 개념 중에 '코나투스'라는 개념이 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삶의 활력'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코나투스가 올라가면 삶의 활력이 증가하고, 코나투스가 내려가면 삶의 활력이 감소한다. 코나투스를 수치로 표현한다면 코나투스가 0이 되는 상황을 죽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활력이 극도로 떨어진 사람들은 삶의 의지를 잃게 되고 극단적인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까지 다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위험을 코나투스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코나투스를 높이는 대상일수록 위험은 사소해지고 코나투스를 낮추는 대상일수록 위험은 증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 말이 맞았다.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겪었던 고통들을 떠올려보니 내가 겪었던 위험들과 절대적으로 불균등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통은 컸지만 사실 위험은 사소했었던 적을 떠올려본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을 때. 첫 직장에 취직했을 때. 독립을 했을 때. 오랫동안 정을 나눈 남자친구, 친구, 혹은 동호회 사람들과 연을 끊었을 때. 그 순간의 고통은 마치 생살이 찢겨 새 살이 돋아나거나, 내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는 것 같은 강도 높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들 덕분에 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권위적인 지도교수 밑에서 유학을 가겠다고 결정했더라면 철학 공동체를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직장에서 이런저런 고통들을 겪어보지 못했더라면 밥벌이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취직을 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면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할 뿐더러 부모님과의 관계도 지금보다 더 엉키고 꼬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정을 나눴다는 이유로 소유욕과 의존뿐인 관계를 지속했더라면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받았을 것이다.


반대로 고통은 사소했지만 위험은 치명적이었던 때도 있었다. 엄마가 대학 입시 원서를 대신 써 주었을 때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것이 관성이었던 나는 그 관성에 기대는 것이 괴로웠지만 그 고통은 사소한 것이었다. 휴학 후 다시 전공 공부를 선택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있었지만 괜찮을 거라며 그 불안에 직면하는 것을 거부했다. 외면하고 모른채 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작은 고통이었다.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돌아보지 못한 채 사회에서 말하는 어른이 되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리는 눈 먼 경주마가 되었다. 철학 공동체에서 내 삶을 지배하고 있던 불안, 피해의식, 컴플렉스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좀비처럼 살았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말처럼, 고통이 개입하는 정확한 순간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 그 고통 덕분에 유기체는 생명 즉 코나투스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지각이 신체의 반사력의 크기를 나타낸다면 정조 (감정)는 그것의 흡수력의 크기를 나타낸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을 더 자세히 보고 정조 (감정)의 필요성은 지각 자체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물질과 기억> 105 P, 앙리 베르그손


지각이 신체의 반사력의 크기를 나타낸다면 감정은 그것의 흡수력의 크기를 나타낸다. 감정에 관해 설명할 때 스승이 사용했던 표현이 와 닿았다. 스승은 인간의 감정을 서로 다른 열팽창율을 가진 두 개의 금속을 붙여 만든 재질인 '바이메탈 (bi-metal)'으로 비유했다. 바이메탈에 열이 가해지게 되면 두 금속이 각각 팽창하며 이 둘은 열팽창율이 서로 다르므로 하나가 더 많이 팽창하게 된다. 이 때 두 금속의 양 끝이 고정되어 있다면 어떨까? 그 결과 열팽창 정도가 낮은 금속 쪽으로 두 금속이 함께 휘어져 흐르던 전류가 차단되게 된다.  


인간의 감정 마찬가지다. 나에게 들어온 외부 자극은 배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흡수' 되어 나의 내부에서 '감정'으로 일어난다. 그 '감정'이 원심신경을 통해 '반사'될 때 '지각'으로 나타나게 된다. 흡수된 자극이 응축되어 쌓이다가 일정 정도 이상이 되면 마치 바이메탈이 휘어져 전류가 차단되듯이 참고 참았던 감정의 물풍선이 터져서 밖으로 튀어나간다. 분노를 참다참다 화를 내는 상황이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이메탈 (bi-metal)의 작동 원리


이를 위험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바이메탈이 휘어져 전류가 차단된다는 것은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수용할 수 없는 정도의 자극이 가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사람의 감정에 역치 이상의 자극이 쌓이게 된다면 이것은 위험의 신호를 의미한다. 내 신체의 일부에 가해진 고통 (국지적 노력)의 수용한계를 넘어선 고통이 나의 몸의 중심에 가까울 정도로 접근했다는 뜻이며 이것은 나의 실존적인 위험을 야기한다. 노력이 국지적이기 때문에 고통과 위험은 절대적으로 불균등하다는 베르그손의 말은 맞다.


앞선 글에서 자의식 과잉을 탈출하려면 지각의 펼쳐짐을 통해 세계를 연장적인 '부분'과 '전체'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지각과 감정은 모두 고통을 수반하며, 지각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감정이 된다고 했다. 이것을 '위험'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앞서 위험은 코나투스와 연관된다고 정리했다. 협소한 지각과 넓은 지각 중 어느것이 한 존재에게 위험으로 다가올까? 좁은 공간에서 사는 사람과 넓은 공간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어떤 사람이 더 코나투스 (삶의 활력)이 높을까? 자연스러운 상태라면, 당연히 넓은 공간에서 사는 사람이 더 자유롭고 따라서 높은 삶의 활력을 유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각의 범위가 좁을수록 위험의 정도가 크고 지각의 범위가 넓을수록 위험의 정도가 작다고 볼 수 있다. 자의식이 심각하게 과잉되었던,  나에게는 위험의 강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한 고통이 점차 커져 더 이상 내가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철학 공동체에 찾아오게 되었다. 마치 바이메탈이 휘어져 전류가 차단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 그렇게 죽어가던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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