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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Nov 20. 2024

오토바이와 나 1

주체는 경험하는가, 경험되어지는가?

나에게는 이름없는 오토바이가 있다. 주황색 차체에 110 cc 짜리 배기량의 작달만한 키와 아담한 덩치를 가진 녀석. 4년 전 즈음 중고거래 사이트를 통해 만나게 된 녀석. 나는 오래전부터 자동차보다 오토바이에 끌렸다. 그건 내가 골프보다도 복싱에 끌리는 이유랑 결을 같이 할 것이며, 그에 더하여 자유분방함이라는 요인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 오토바이는 2종 보통 면허로도 탈 수 있는 스쿠터다. 흔히 오토바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날렵하거나 육중한 차체를 가지며 고속으로 질주하는 용도의 본격적인 모터사이클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가장 빠르게 달리면 시속 100 km도 너끈한 녀석이었고 굳이 그 이상의 속력을 고집하면서까지 객기를 부릴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체의 크기도 그렇고 체고도 그렇고 여러모로 나에게 안성맞춤이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색깔이었다.


나는 주황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역사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빠는 내가 어려서부터 해외 출장을 빈번하게 다녔다.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에미레이트, 쿠웨이트 같은 중동국가들부터 해서 말레이시아나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나 독일 같은 유럽 국가들까지. 아빠의 여권에는 빈 공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빼곡히 출입국 도장이 찍혀 있곤 했다. 언젠가는 한 번 아빠가 조금 으스대는 말투로 여권 지면에 더 이상 여백이 없어서 새로 발급을 받아야 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여권 갱신 기한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지만 다녀온 국가가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새 여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아빠의 허영심과 잘난체가 참 보기 싫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아빠는 길어야 일년 정도 체류했고 혹여나 그 이상의 기간동안 머무를 경우에는 한국에 들어와 몇개월씩 지내고 들어갔다. 6개월 이상만 되더라도 중간에 한국에 꽤 오래 머무르다 가곤 했었다. 그런데 중국 출장만은 예외였다. 2년이라는 긴 체류기간이라는 점이 달랐고 다른 때와는 다르게 한국에 들어오는 텀도 길고 방문하는 기간도 짧았다. 엄마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신혼시절부터 아빠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어린 나와 동생을 엄마 홀로 뒷바라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아빠가 중국 출장을 가 있을 시기는 하필이면 내가 고3이 되던 때와 겹치고 말았다. 그 당시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식구들을 잘 건사하고 자식들 공부 잘 시켜서 좋은 대학 보내는 것으니,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아빠 없이 홀로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 아빠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내가 엄마 속을 썩이거나 모의고사 성적이 낮게 나오면 엄마는 나에게 한바탕 쏟아내면서도 꼭 곁따리로 아빠를 원망하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너희 아빠만 옆에 있었어도 애들이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을텐데"
그 때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아빠가 집에 없어서 좋기만 했으니까. 나는 오히려 아빠가 집에 있으면 불안했다. 주말이면 아빠 눈치를 보느라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아빠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다혈질인 아빠는 한 번 성미가 돋으면 무지막지하게 폭언을 쏟아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이곳저곳 막무가내로 맞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와 나를 중재하느라고 중간에서 어쩔줄라 하며 피를 말렸다. 나는 식구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마찰들이 지긋지긋하고 치가 떨렸다.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 덩어리들을 다룰 줄 몰라 아빠나 엄마 탓으로 던져버리고 방안으로 틀어박히곤 했다. 그러나 그 원색적인 감정의 덩어리들이 날것 그대로 낭자한 거실에 홀로 남겨졌을 엄마에게는 누구라도 기댈 사람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그 때 아빠가 없어서 불안했던 건 우리가 아니라 엄마였던 것이다.


아빠는 중국으로 떠났고 우리는 간간히 전화 통화만 하며 아빠 목소리를 들었다. 그마저도 의무적이었던 적이 많았다. 아빠가 출장을 갔던 시안시는 내륙지방이라 유별나게 더웠다. 한낮이면 기온이 섭씨 40도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엄마는 아빠가 공사 현장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걱정했다. 중국 사람들은 영어도 잘 못해 말도 안통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어울리려면 술과 담배를 많이 해야한다는 이야기까지 우리에게 늘어놓으면서. 그리고서는 너희 아빠가 너희들 좋은거 먹이고 공부시키느라고 중국까지 가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는 신신당부로 끝맺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수록 공부는 더 안됐고 마음의 짐은 무거워져만 갔다. 아빠의 고생을 담보로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쉬운 공부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싶어서였다.


그러던 중 아빠가 한국에 잠시 들어온다고 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잠시 들어온 아빠는 예전과 다르게 유쾌해 보였다. 중동이나 동남아 같은 나라에 출장을 갔다 들어오면 어딘가 지쳐있고 말수가 적었던 것 같은데 중국에 다녀오고 나서는 우리에게 농담도 자주 걸고 말도 많아지고 웃음이 헤퍼진게 영 아빠같지 않아 이상했다. 아빠가 속칭 '짱깨' 가 된 것 같아 싫었다. 그 즈음의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국사나 중국어 수업시간에 배운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국민 정서가 그 나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서 아빠가 짱깨가 되어 돌아온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아빠가 그 무렵즈음 자주 입고 다니던 주황색 경량패딩이 그렇게도 꼴보기가 싫었다. 말투나 태도가 달라진 것이 '짱깨'에 대한 심증이었다면, 주황색 경량패딩은 그 혐의를 사실로 만들어 물증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빠는 그런 나의 속도 모르고 친구를 만나러 갈때며 식구들끼리 외식을 갈때며 할머니를 뵈러 갈때며 줄기차게 그 지긋지긋한 주황색 패딩을 걸쳤다.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아빠가 응급실에 갔으니 당장 오라는 것이었다. 엄마도 막 연락을 받고 가는 길이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것 같았다. 응급실이라는 단어에 겁을 집어먹고 경황없이 을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난생처음 와보는 응급실이어서 겁부터 났다.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에게 아빠 이름을 대니 간이침대로 안내해줬다. 엄마와 동생은 이미 도착해있었다. 그리고 활짝 젖혀진 커튼 뒤로 주황색 경량 패딩을 입은 아빠가 머리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붉은 얼굴의 아빠의 입이 갑자기 헤벌쭉 벌어지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짜요!"

마음에 금이 쩍 갔다. 아빠는 만취해 있었다. 원래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한국에 있을 때에는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한 모습을 보인적이 거의 없었던 아빠였다. 그런데 지금 응급실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주황색 패딩을 입고 머리에는 누런 붕대를 엉성하게 두른 채 불그죽죽한 얼굴에 충혈되고 풀린 눈으로 히죽히죽 웃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아빠는 나랑 엄마랑 정민이를 번갈아보며 자꾸만 "짜요! 짜요!" 했다. 조용한 응급실을 아빠의 목소리가 헤집어놨다. 지나다니는 간호사가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옆 침대 환자들의 짜증섞인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와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엄마에게 물었다.

"아니 도대체 짜요가 뭔뜻인데?"

"나도 몰라. 중국어로 무슨 화이팅인가 그렇다는데" 엄마는 아빠의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느라 끙끙거리며 말했다. 엄마도 휘적휘적 흔드리는 아빠랑 싱크가 된 듯이 좀 가만히 있으라, 시끄럽다, 여기 병원이니 입좀 닫으라, 하며 쉴새없이 부산을 떨었다. 엄마의 표정을 보니 창피함과 안쓰러움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는 씨티를 찍어야 하니 아빠를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다. 아빠는 그 간호사에게까지 "짜요" 했다.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간호사가 아빠를 데리고 가고 나서야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친구랑 같이 술을 마시러 갔다가 집에 택시를 타고 왔는데 내릴때 넘어지면서 보도블럭에 머리를 찧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넘어진 이유가 택시 기사가 아빠를 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빠의 주장이었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빠를 동네 주민이 발견하여 신고를 해서 구급차에 실려왔다고 했다.


다행히 아빠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고 다음날 그 사건은 아빠가 꾸며낸 이야기로 밝혀졌다. 술이 깨고서 아빠가 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빠의 말을 애초에 믿지 않았었다. 술주정뱅이 양반이 또 주정을 부려놓고 남탓 하는 거라고 내심 넘겨짚고 있었다. 술 때문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부전자전으로 아빠도 술이 말썽이구나, 엄마와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들을 속으로 뇌까리면서. 나는 그 때 아빠가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아빠가 미웠다. 나에게 죄책감을 주는 아빠. 집에 없는 것이 더 편한 아빠. 나를 지켜주던 아빠. 그래서 존경하고 두려워했지만 증오의 씨앗도 함께 주었던 아빠. 그런데 이제는 싸구려 짱깨가 되어서 나타난 아빠. 그 모든 감정들이 뒤섞이고 뒤틀어져 무고한 주황색 경량패딩의 형태로 응고됐다. 그 이후로 주황색만 보면 응급실 간이침대에 앉아서 만취한 채 바보처럼 웃으며 "짜요!" 하던 아빠가 떠올랐다.


2013년 6월, 아빠와 함께 중국 시안에서




주황색 차체를 고르게 된 이유는 한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너는 주황색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을테지만 그 때에는 그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원래 나는 파란색이나 베이지색을 사고 싶었다. 노랑 빨강 주황 핑크 같은 색깔들은 귀여운 느낌이라 싫었다. 그 때의 나는 터프하고 멋진 걸크러시를 표방하고 싶었나보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내가 귀엽고 아기자기한 느낌의 오토바이를 타기를 원했다. 조금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서 주황색 오토바이를 골랐다. 그 친구는 나를 위해 함께 오토바이를 거래하러 가 주었다. 안 그래도 기계치인 나는 오토바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반면 그 친구는 오토바이를 옛날부터 타 와서 나보다 지식이 해박했다. 혹시라도 어려보이는 여자 혼자서 갔다가 사기를 당할 염려도 있었으니 그 친구의 동행이 참 든든했다. 친구 덕분에 무사히 거래도 하고 도로 주행연습도 간단히 마친 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토바이를 샀지만 차가 있었던 나에게 그저 동네 마실용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색깔 때문인지 애착이 가지 않기도 했다. 무엇보다 주황색 차체를 보면 자꾸만 아빠의 경량패딩과 '짜요'가 떠올랐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 같아 보여서 영 쳐다보기가 싫었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소원이었던 오토바이가 생겼으니 친구들과 함께 근교에 나들이도 나가고 가끔 오토바이가 없는 친구들을 태워주기도 하면서 조금씩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즐겁게 드라이브를 하고 오면 주황색 오토바이도 나름대로 앙증맞고 귀여워 보일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왠지 밉살같아 함부로 대하곤 했다. 자주 넘어뜨리고 긁혀서 오토바이의 몸에는 생채기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파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파주는 먼 곳도 아니지만 그 때엔 초보 라이더였기 때문에 겁이 났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막상 교외로 나가 푸른 논밭을 끼고 달리니 근심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자신감이 붙자 속력을 내 보기도 했다. 봄이었던지라 얼핏 스치는 훈훈한 꽃내음과 배경처럼 은은히 맡아지는 흙냄새, 그리고 구수하고 쿰쿰한 거름냄새가 늘어져있던 후각 세포 주위를 맴돌며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오랜만에 살아있는 것 같은 생생한 유쾌함을 느꼈다. 파주와 일산쪽 도로가 다른 도로에 비해 노후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다. 움푹 패이거나 울퉁불퉁한 도로를 넘을때 엉덩이가 들리고 덜컥거리는 것이 그저 재미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일산부근의 일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점프하는 스릴에 빠져있던 나는 눈 앞에 보이는 방지턱을 보고 스로틀을 살짝 더 당겼다. 솟아오른 방지턱을 넘으면서 앞바퀴가 퉁 튕기며 생각보다 큰 반동과 함께 지면에 착지했고, 순간적으로 균형을 잡지 못한 나는 핸들을 비틀어 꺾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이크와 함께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뒤에서 따라오던 차량이 서행을 하고 있어 나를 짓뭉개고 지나가지 않고 곧바로 멈추었다. 그리고 핸들을 꺾은 각도도 정면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는지 그저 삐끗한 정도여서 차체가 중앙선 너머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반대편 방향에서 차가 오고 있었으니 만약 중앙선을 넘어갔더라면 그대로 정면충돌 했을 것이다. 지나고서 그 때의 상황을 복기해보면 참 아찔했지만 그 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멍하게 오토바이 아래 깔려서 있던 나는 우선 오토바이를 일으키고 부서진 부품 잔해들을 주워서 절룩거리며 갓길로 빠졌다. 다리와 어깨 그리고 갈비뼈쪽에 충격이 있었는지 얼얼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덜컥 겁부터 났다. 먼저 가던 친구가 다급하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친구의 도움으로 택시를 잡아서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나는 숨이 점점 더 안 쉬어지는 것 같아 점점 공황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갈비뼈를 부딪혀서 갈비뼈가 부러진게 아닐까.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서 폐포에 구멍이 난 게 아닐까. 한쪽 폐로 숨을 쉰다면 얼만큼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들기 시작하자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도 얼빠진 나를 대신해 친구가 이런저런 뒷처리와 수습을 해 주었다. 기본적인 검사를 하고 응급실에 입원을 했다. 결과가 나오기 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고통스러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죽음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간수치가 높게 나왔다고 하여 씨티를 찍어보니 간이 찢어져서 출혈이 있었다고 했다.  갈비뼈 연골에도 미세골절이 있다고 했다. 입원을 해서 간의 출혈이 자연히 지혈이 되면 퇴원하는거고 아니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도 치솟았던 간수치는 정상궤도를 찾았고 며칠간의 입원 후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오토바이에 대한 마음이 복잡하게 얽혔다. 아빠의 응급실과 주황색 경량 패딩 그리고 나의 응급실과 주황색 오토바이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결코 원치 않았던, 그러나 운명처럼 내 앞에 놓여있는 대칭무늬에 대하여 생각했다. 나는 내가 응급실 침실에서 희미하게 느꼈던, 시간을 관통하는 불길한 기시감을 하염없이 뿌리치려고만 했다. 그런 나의 마음은 사고 이후에도 조금 더 조심히 라이딩을 하게 되었을 뿐 오토바이를 잘 돌보지 않았던 나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어쩌면 바뀌었던 것은 없었던지도 몰랐다. 세차 한 번 한 적 없고 사이드 미러가 헐거워져도 손보지 않으며 겨울에는 방전이 될 때까지 방치하고 장마철 비를 오래 맞혀 철골에 녹이 슬었다. 그렇게 외면하다보면 언젠가는 싸구려 짜요의 주황색 위에 내가 좋아하는 감귤빛 주황색이 덧칠될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런 식으로 아빠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때 아빠와 패딩과 나와 오토바이는 이미 재현하고 재현되어지는 업보의 도돌이표 속에 있었다는 것을. 그 사건 이후로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산 다음날 주차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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