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21)
"밥 한 번 먹자"가 불편한 이유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 우리가 거기서 우선적으로 포착해야 하는 것은 그 상황이 우리의 어떤 경향이나 어떤 필요에 답할 수 있는 그런 측면이다. 그런데 필요는 곧바로 유사성이나 성질로 향하며, 개별적인 차이를 만들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동물의 지각은 이 유용한 것의 분별로 한정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순수기억'은 '꿈(예술)의 평면'에 펼쳐지는 기억이며 '차이성'을 주로 지각하도록 돕고, '습관기억'은 '일상(행동)의 평면'에 펼쳐지는 기억이며 '유사성'을 주로 지각하도록 돕는다. 베르그손은 인간의 기억을 구성하는 이 두 기억 중 '습관기억'이 더 근본적이라고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포착해야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느냐이다. 꿈 (순수기억, 예술)과 생계 (습관기억, 일상) 중에서 우선적으로 포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계이다. 생계는 곧 생존을 의미하기에 가장 근본적인 필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습관기억은 곧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동물'의 지각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기억이다. 그것은 나의 생존에 유용하냐 유용하지 않느냐를 분별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안부 인사가 바로 "밥 한 번 먹자"라고 한다. 회사를 다닐 시절 거래처와 미팅 약속을 잡을 때 기준점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식사 여부'였다. 특히 사업적으로 중요도가 높은 거래처일수록 혹은 참석하는 사람들의 직급이 높아질수록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식당 예약을 내가 맡을 때가 잦았는데, 그럴 때면 어떤 식당을 골라야할지 골머리를 앓았다. 나중에는 상황 (식사 시간, 참석자의 연령대, 참석인원, 미팅의 성격 등)에 따라 적절한 식당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그에 따라 적절히 예약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늘 이렇게 생각했다. '도대체 처먹는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야 한담?'
직장 동료들은 법인카드로 식사를 사먹는 것에 집착하곤 했다. 점심 식사 시간때면 메뉴를 고르느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특히 한달에 한 번 영업 회의라도 하는 날에는 차를 타고 나가서라도 좋은 식당에 가서 먹고 와야 했다. 본사에서 외국인 직원들이 오면 그들의 입맛에 맞춰 식당을 물색하는 것도 나의 업무 중 하나였다. 어떤 직원은 한국식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하는 반면 또 다른 직원은 자신의 나라에서 먹던 것과 비슷한 음식을 먹고 싶어했다. KTX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하더라도 끼니는 꼭 제대로 챙겨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까지 대접해서 호텔로 돌려보내야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때에도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대충 처먹으면 되지 왜 이렇게 먹는거에 집착한담?'
밥을 먹는 행위. 그건 나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사람들은 기쁘거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울할 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소중한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그런데 이 '밥'이 '직장 사람들'이라는 소중하지 않은 사람과 엮일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특히 그들과 비싸고 고급스러운 식사를 하거나 그 식사에 진심을 담아야 할 때면 더욱 그렇다. 그것은 '밥(소중함)'과 '소중하지 않은 사람들' 조합에서 기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서만 불편함을 느꼈던 게 아니었다.
한창 바쁘게 보내던 20대 시절, 식사를 할 때 드는 시간과 돈이 아까웠다. 하루하루 시간을 아껴 쓰던 나는 식사를 대충 해결할때가 많았다. 지하철 역사에 앉아서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삼각김밥, 김밥, 샌드위치 같이 한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간편식들을 10분도 안되어 해결하곤 했다. 그런 습관은 지금도 나에게 남아 있어서, 바쁠때면 편의점에서 간단한 음식을 사서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길거리에서 식사를 끝마치곤 한다. 퇴사를 하고 요리를 해 먹는 지금 역시 가능한 빨리 조리할 수 있는 음식을 택해 휘리릭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빠르게 만들어 먹곤 한다. 최근 유행했던 <흑백요리사>가 흥행했을 때에도 나는 사실 공감이 가지 않았다. 나에게 '습관기억' (밥)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고 저급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
훈육된 '습관 기억'을 넘어서
우리의 견해로는 여기서 유사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심리적 본성의 노력이 아니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 의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무의식 속으로 던져버리지 않았다. 이 유사성은 하나의 객관적 힘처럼 작용하며, 전체의 같은 결과들이 같은 심층적 원인들을 따르도록 하는 전적으로 물리적 법칙 덕분에 동일한 반응을 일으킨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물 한 방울 속에서 움직이는 아메바의 의식과 같은 초보적 의식을 상상해 보라. 이 극미동물은 그것이 동화할 수 있는 다양한 유기물의 차이가 아니라 유사성을 느낄 것이다. 요컨대 광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가장 단순한 의식적 존재로, 동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것은 사물과 존재가 주변으로부터 그들을 유혹하는 것을 취하는 작업의 진보이다. 그들을 유혹하는 것은 그들이 추상할 필요 없이, 단지 주변의 나머지 것들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작용들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같다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 일반 관념들로 발전시키는 씨앗이 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모든 존재에게 '습관기억'은 '심리적 본성의 노력'이 아니라 '객관적 힘처럼 작용'하는 '물리적 법칙'과 동일하다고 이야기한다. 즉 무생물부터 생명체까지 모두 '유사성'을 포착하여 자신의 생존 (필요)에 필요한 것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습관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습관기억'이 일반 관념 (추상)으로 발전되는 씨앗이 된다. 이러한 진화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순수기억'이 형성되는 것이다.
나는 왜 '먹는 것' 혹은 '식욕'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떠올려보면 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식욕, 색욕, 수면욕)에 대해 모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릴적부터, 이런 욕구들이 들면 죄책감이 들곤 했다. 철학을 배우면서 기독교, 스토아 학파, 자이나교의 금욕주의를 접하며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습관기억'보다 '순수기억'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나의 그러한 경향이 금욕주의적 세계관 때문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기억의 균형 감각은 '최선'이 아니라 '차악'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조직된 자아가 과연 건강한 자아일까? 그렇지 않았다.
억압된 욕망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금지했던 욕망들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과거의 나는 '순수기억'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 누구보다 '습관기억' (밥, 잠, 섹스)에 치우쳐 살고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습관기억에 충실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바로 '훈육된 자아' 때문이었다.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는 중요한 의미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수련하다' '단련하다'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배려'는 정신적인 태도라기보다는 훨씬 행동의 형식, 응용적이고 규칙화된 경계 행위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체의 해석학』 미셸 푸코
자기 본래 상태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합니다. 단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기 되기가 바로 자기실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며 중심 주제입니다.『주체의 해석학』 미셸 푸코
미셸 푸코는 20세기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당대 서양철학에서 최고 지성이라고 불리울만큼 저명한 철학자였다. 성, 광기, 권력 등 금기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던 그의 철학은 그 탁월함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에서 동성애자였던 푸코는 언제나 비난과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랬던 그였기에 말년의 푸코는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긍정하는 '자기 배려'라는 개념을 창안하게 된다.
나는 소위 말하는 중증 '착한 아이 컴플렉스'환자였다. 언제나 친절과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까지도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했다. 문제는 내가 '훈육되었다'는 사실을 모를정도로 그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나에게 해를 입혀도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해서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다고 '느끼곤' 했다. 그랬으니 그 '착함'이 '훈육된 '착함'인 줄 몰랐다. 나의 온화함과 나이스함이 단지 '소심함'의 발현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격기 종목을 만났다. 그리고 한동안 격기 종목 운동에 꽤 깊이 몰두에 있었다. 지금와서 떠올려보면 그 때 나는 반쯤 미쳐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육체적으로' 때리고 꺾고 상처입히고 싶다는 욕망을 복싱과 주짓수를 하며 처음 느껴 보았다. 때로는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그런 욕망이 들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도 어떤 일이 주어져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푸코가 말하는 '단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기 되기'를 나도 모르는 사이 실천했던 셈이었다. 내가 모르던 힘과 감정과 충동이 내 안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그럴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좋았다. 언제나 위축되고 눈치보며 살던 내가 너무 싫었으니까. '착한 여자'보다 '썅년'이 된 내 모습이 좋았다. 더 이상 맞고 살지 않을거야.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을까? 점점 내 주변엔 사람이 사라져갔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내 마음속에서 내가 그들을 몰아냈다. 착한 아이 컴플렉스에 걸려있을 때처럼 낑낑대며 그들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지랄맞게 구는 너의 마음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마음속에 성벽을 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파괴(처벌)'에서 '자기 배려'의 습관으로
광기는 부서지기 쉽지만 최고의 지혜이다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자기 파괴적이지 않은 '광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단한 '자기실천'을 통해 이르게 되는 광기다. 그 '광기'를 통해 '삶'과 '나'의 진실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배려'에 이르게 된다. 훈육된 자아는 진정한 자신을 오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지속적인 훈육으로 인해 내면화된 악습과 의존성에 의해 진정한 자신을 왜곡하게 마련이니까. 이 훈육된 자아를 넘어서는 길은 '광기'에 있다.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과 뼈 속까지 침투한 권력(도덕, 근면, 성실, 정숙, 정조...)와 맞서 싸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 광기는 '자기실천'을 통한 '광기' 여야 한다. 끝없이 수련하고 단련하는 수행의 과정을 통해 미쳐야 한다. 그 '자기실천'을 통한 광기로 우리 내면의 오류,왜곡,악습,의존성을 넘어야 한다. 때로는 불편하며 불쾌하며 낯설고 고될 수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미셸 푸코 <광기> 수업 중, 황진규
폭력적이고 동물적인 충동이 날뛰던 시기가 지났다. 그랬던 내 모습이 가끔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퇴사를 했다. 부모라는 믿을 구석이 있었지만, 다시 부모 눈치를 보느라 퇴사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마주치는 권력자들에게 다시 눈치를 보고 주눅드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제 나는 이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위축되었다. 나는 다시 과거의 소심했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푸코의 '생명권력'은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억압하고 감시하는 권력이다. 즉, '훈육된 자아'는 '습관기억'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배변을 바깥에 하도록 훈련받은 개는 집에서 배변을 스스로 배변을 해결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다. 과거의 '훈육된 나' 역시 개와 다르지 않았다.
인간과 개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자유의지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습관기억'을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습관기억을 바꿀 수 있을까? '순수기억'을 통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기억'은 꿈과 잠재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나는 왜 다시 '소심했던 나'로 돌아왔을까? 어쩌면 나는 과거의 동물적이었던 내 모습을 긍정하지 못했던게 아닐까? 그 시기를 거치며 얻은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나는 주로 '슬픔'을 필터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크도록 기억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모습을 긍정한다는 것의 시작점은 기쁨과 슬픔을 있는 균형있게 받아들이는 것일테다.
격기 종목을 하며 느꼈던 '단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나'는 나의 '순수기억' 속에 깊숙히 박혀있었다. 이제 나는 그 '순수기억'을 통해 무작정 욕구와 욕망을 '금지' 했던 습관을 넘고 싶다. 내가 터부시하던 '습관기억' (밥, 잠, 섹스)에 대한 새로운 '순수기억'을 생성하여 유쾌하고 기쁜 '습관기억'으로 바뀌어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진짜 낭만적인 파이터이자 유쾌한 썅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기 파괴적인 수련이 아니라 자기를 배려하는 수행. 그 수행의 길에 진지하게 올라보겠다.
언젠가 "밥 한 번 먹자!"를 너에게 기쁜 마음으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