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에서 '그림'으로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24)

by 홍보경
결정장애의 원인: 부주의함과 책임회피
결정을 내리는 것이 문제인가? 정신은 자신의 경험 전체를 우리가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모아서 조직화하면서 행동들로 집중시킬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역 원뿔 도식'을 통해 삶에 주의를 기울여 사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다못해 오늘 점심식사를 고르는 순간에도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은 '결정'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수많은 선택지 중에 하나의 옵션을 골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선택을 하고 싶어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 결정에 '주의'를 기울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주의를 기울이는 삶'은 곧 '지혜로운 결정을 하고 행동하는 삶'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심각한 결정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옷을 사러 가면 모든 옷이 다 예뻐 보여서 쉽사리 고르지 못했다. 식사 메뉴를 고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맛있어 보이고 저것도 맛있어 보여서 쉽게 메뉴를 고르지 못했다. 일상에서 흔히 있는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서 나는 늘 고민하고 주저했다. 이런 저런 선택지 모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의 마음상태는 무엇이었을까? 모두 가지고 싶다는 게걸스러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를 선택했을때 내가 짊어져야 하는 불확실성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책임감 부재의 마음이었다. 이런 나의 마음은 단순히 일상에서의 작은 결정들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진로 결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몰랐다. 사람들이 물어오면 '외교관', '수의사', '과학자', '대학 교수'라고 답하곤 했지만 늘 떨떠름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나의 꿈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의 실존 앞에서도 나는 결정 장애를 겪고 있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결정 내리지 못한 채 부모와 사회가 옳다고 용인했던 진로로 내몰렸다. 그것은 나의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사회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결정내릴 용기가 없어서 현실과 타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주체적으로 그 진로는 '선택'했다고 합리화하고 그 삶에 투신하고자 했다.


철학 공동체에서 철학을 배우며 처음으로 실존적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나에게 있어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을 주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실존적인 결정이 나에게 엄청난 기쁨을 주었다는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삶은 그 기억을 가지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


무채색 삶의 두 가지 양태


철학자들이 말하는 '진짜' 삶을 살고 싶었다. 석가모니가 말하는 '본래면목'을 찾고 싶었다. 운이 좋게 꽤 괜찮은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내 또래에 비해 적지 않은 돈을 받았고 야근이 많지 않았다. 그 특권들로 틈틈이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보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나는 계속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 헤맸다. 직장이라는 안전망 안에서 내 욕망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며 뭔가에 꽂힐 때마다 "이걸 업으로 삼으면 어떨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상상이기는 했어도 허무맹랑한 공상에 머무르지만은 않았다. 나는 어떤것에 관심이 가면 내가 몸으로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한창 음악에 빠졌을 때에는 밴드를 만들기도 하고, 공연을 하기도 하고, 음원을 내기도 하고, 인지도 있는 음반사와 계약을 하기도 했다. 또 한창 무용과 요가에 빠졌을 때에는 다양한 움직임 수업을 듣기도 하고, 지도자과정을 듣기도 하고, 하루에 50만원씩 하는 해외 저명 아티스트 초청 워크샵에도 참석하곤 했다. 한창 격기종목에 빠졌을 때에는 생활체육대회에 나가고, 생활체육지도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나는 항상 바빴다. 언제나 순간순간 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났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알록달록한 색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무채색의 인간이었다.


무채색의 인간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욕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주입한 욕망만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좋은 대학에 가는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승진하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람들의 색깔은 무채색이다. 자신만의 색깔이 없어서 검은색 혹은 회색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두번째는, 여러가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소위 말해서 '취미 부자'라고 일컬어지는 부류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이런저런 일 혹은 프로젝트들은 벌리기를 좋아하는 부류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얼핏보면 이런 사람들은 항상 에너제틱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 역시 무채색이다. 여러가지 색깔을 섞으면 검은색에 가까워진다. 그들의 무채색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알록달록함은 사실 뒤집어진 무채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무채색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다.


나는 두번째 부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왜 무채색의 인간이 되었을까? 삶이 공허하고 무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해도 내가 완전히 채워진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고 늘 허전했다. 마음 한켠에는 어린시절 글을 쓸 때면 느꼈던 충만함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욕망을 쉽사리 꺼내보이지 못했다. 진짜 내 욕망이 아닐까봐, 실패할까봐 두려워서였다 수많은 욕망들 속에서 그 어느것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나는 또다시 우유부단함과 결정장애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퇴사 결정 = 기억 + 성격 + 현재 상황
거기서 당신은 그 행동들에 질료의 역할을 하는 과거와 함께 인격이 그 행동들에 새겨넣는 예견되지 않은 형태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행동은 현재 상황, 즉 시간과 공간에서의 몸이 어떤 특정한 위치로부터 나오는 정황들의 총체에 들어맞도록 이루어질 때만 실현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결정'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까? 베르그손은 결정(행동)의 변수를 '성격 (인격)', '기억', 그리고 '현재 상황'이라고 본다. 즉,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더라도 성격과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점점 더 불행해진다고 느꼈다. 내가 누리는 특권이 더해질수록, 내 안에서 나를 조롱하는 묵은 환멸감이 활개를 쳤다. 특권만큼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일을 해야했지만 내 마음과 정신을 직장에서 소진시키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아껴서 내가 써야 하는 곳에 쓰고 싶었다. 나는 책임을 분산시키는 법을 터득했다. 비겁함은 환멸감의 덩치를 불렸다. 그렇게 아낀 마음임에도 현명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 자체가 고통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운동에 매달렸다. 그렇게 몸과 정신을 녹초로 만들어 사유할 틈이 없도록 만들었다.


직장을 그만두었다. 나는 심각한 결정장애에서 벗어났던 것이었을까?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었다. 결정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기억, 성격, 현재 상황에 대해 고찰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렇게 깊이 사유하고 고심해보는 과정 자체를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친구 중에 나처럼 심각한 결정장애를 겪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현재 상황이 행복하지 않음에도 고민만 할 뿐 결정하지 않곤 했다. 그 친구 역시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선택지 앞에서 그에 얽힌 기억을 반추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 친구와 나 모두 '결정장애'의 상황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둘의 차이점이라면, 나는 그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주로 충동적으로 무모한 선택을 저질러버린다면 그 친구는 그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영원히 선택 판단 보류의 상태로 머무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내가 가진 '기억' 때문이었다. 삶에서의 실존적인 선택을 늘 급선회의 방식으로 해 왔던 나였다. 그리고 그랬던 경험에서 엄청난 기쁨과 엄청난 슬픔 모두 경험해봤다. 나는 삶의 무의미에 시달리던 사람이었다. 무의미에 오래 시달리다보면 감각이 마비된다. 강도높은 기쁨과 슬픔은 큰 자극이다. 나는 그런것을 느낄 때에만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러니 그러한 방식의 급격한 방향 전환이 나에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을 추동한 가장 결정적인 '기억'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억'만 있지는 않았다. 철학 수업을 들으며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도 행복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분명 직장에서 만났던 사람들보다 더 행복했다. 그 '기억' 이 결정을 추동한 두번째 이유였다.


나의 '성격'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의 무모하고 충동적인 성격은 우유부단함의 반대급부로 생겨난 것이었다. 우유부단함의 원인에는 소심함이 있다. 나는 소심했던 내가 싫었다. 소심한 상태에 머물며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느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무모하거나 사려깊지 못한 행동은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의 비뚤어진 발현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내가 처했던 상황은 어땠을까. 가보지 않은 길은 알 수 없기에 더 오래 직장을 다녔을 때의 중압감을 견딜 수 있을지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겠지만, 퇴사를 할 당시 나는 직장의 일 자체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과 나에 대한 환멸감이 극심한 상태였다. '되고 싶은 나'와 '현재 나' 사이의 괴리감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되고 싶은 나' 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준비되지 않은 퇴사를 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정장애를 가진 사람이 충동적으로 결정을 저지를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의 삶이 가볍기 때문이다. 삶이 가벼운 이유는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의 깊은 삶: 나만의 균형으로 '낙서'에서 '그림'으로 나아가기
지적인 작업, 어떤 개념을 형성하거나 다소 일반적인 관념을 다수의 기억으로부터 추출 해내는 것이 문제인가? 커다란 여백이 한쪽으로 공상에, 다른 쪽으로는 논리적 판별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관념이 존속할 수 있으려면, 어느 면에서건 현재의 실재성에 접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정신에 의해 표상되는 동시에 정도를 더해가며, 그리고 자신의 점진적인 감소나 응축에 의해서, 많건 적건 몸에 의해 작동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따라서, 우리의 몸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받아들이는 감각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운동과 더불어 분명 우리의 정신을 고정하는 것이다. 즉 정신에 무게 추와 균형을 주는 것이다. 그런 감각과 운동은 삶에 대한 주의라 불릴 수 있는 것을 조건 짓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정신의 정상적인 작업에서 모든 것은 꼭짓점에 의해 거꾸로 서 있는 피라미드처럼 감각과 운동의 응집력에 달려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매일 아침 7시부터 오전동안 글을 쓰고, 정오부터 오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느즈막한 오후즈음 책을 읽고 수업을 듣고, 저녁에 체육관에 가고, 밤에 다시 돌아와 못다쓴 글을 쓰거나 읽고 싶은 책과 영화를 본다. 나의 결정에 대해 다소 비관적으로 적었지만 사실 나는 내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혼란스럽고 매일매일이 전쟁터 같아도 지금의 삶이 더 진짜 삶처럼 느껴진다. 내가 더 살아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이제 나에게 남는 몫은 이 결정이 '주의깊은 결정'이 되도록 현재를 잘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없어 한없이 가벼운 나는 이제라도 사랑하는 것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내가 넘어졌던 그 곳에 다시 출발선을 그어야만 한다.


베르그손은 우리의 정신을 "거꾸로 서 있는 피라미드"로 묘사한다. 그가 개념화한 "역 원뿔 도식"을 떠올리면 된다. 이 입체도형은 꼭짓점이 아래로 향하고 있어 불안정하다. 이것이 쓰러지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회전해야 한다. 그렇게 꼭짓점으로 "감각과 운동이 응집" 되어 그 점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균형을 잡는다. 여기에서 꼭짓점은 우리의 '몸'이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순수기억'을 찾아 '상기억'을 거쳐 '습관 기억'으로 응축시켜 '몸'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 "정신에 무게 추와 균형을 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의 깊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베르그손에 따르면,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사유'에 관계한다. 어떤 생각이 '주의' 깊은 '생각'이 되려면, "많건 적건 몸에 의해 작동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주의'의 대상을 고정하고 '몸'을 통해 '감각'하고 '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을 '몸'으로 감각하고 운동해 사유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그렇게 매순간 균형잡힌 결정을 내리는 것. 그것이 베르그손이 말하는 '주의 깊은 삶'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본다. 나는 어떻게 '주의 깊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글을 욕망하는지 아직 잘 모른다. 그러니 나의 '결정'이 나에게 '균형' 잡힌 결정이었는지 아직 모른다. 퇴사라는 무모한 모험에 인심을 써서 조금이라도 너그러운 이름표를 붙여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작가'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연습보다 실전에서 더 역량을 잘 발휘했던 기억이 있다. 책임져야 할 것이 없으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실전에 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나의 균형점은 어쩌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글'을 무기로 전쟁터에 나섰으니 내가 '주의'하는 대상은 '글' 이다. 다시 말해, '글쓰기'를 몸에 의해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내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에는 두 가지 글이 있는 것 같다. 독자를 상정한 글과 그렇지 않은 글. 나는 두 가지 글 모두를 써왔다. 전자는 브런치이든 좀 더 내밀한 공간이든 타인에게 공개하는 글들이었고 후자의 글들은 마음이 어지러울 때 홀로 정리하기 위한 목적의 글이었다. 독자가 있는 글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글들이다. 나는 오랫동안 '말' 없이 살아왔다. 소심했던 나에게 글은 '말'의 수단이었다. 누군가가 내 마음과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에게 독자는 세 부류로 나뉜다. 첫번째 독자는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 나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보듬어 주려는 사람들이다. 두번째 독자는 나를 아껴주고 나 역시 그들을 아껴주고 싶지만, 내밀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세번째 독자는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 독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첫번째 독자들은 '나'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써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의 어둠과 밝음 모두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글은 나의 몸을 통해 쓰여지는 '삶' 그 자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글을 써오지 못했다. 그들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에 오히려 나를 숨기는 글을 써왔다. 어쩌면 이번 글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무너지지 않는 법은 단 하나다. 그 대상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심지어 그가 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원했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초현실적인 사랑은 그렇게 탄생하는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거짓말 속에서 너와 만나고 싶다. 현실을 초월하는 글을 쓰고 싶다.


두번째 독자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볼때마다 내 마음을 해명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이해받고 싶은 마음보다는 조금 더 방어적인 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에게 오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사실 그들에게 나의 어둠까지도 사랑받고 싶었나보다. 그들이 세상사람들을 의식하는 시선으로 나를 볼 때 슬펐다. 아마도 그건 나 역시 그들의 밝음과 어둠을 있는 그대로 껴안아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미성숙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종종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찬란한 모래알의 이미지가 그려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슬퍼지고 조바심이 났다. 늦기전에 서둘러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세번째 독자는 얼굴조차 본적 없고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낀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세번째 독자로서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었다. 내가 앞선 독자들을 만나게 된 이유도 사실은 세번째 독자라는 경로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가장 단독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때로 바다에 떠밀려 온 유리병 편지를 받는다. 낯이 익은 작가도 있고 낯선 작가도 있고 이름조차 모르는 작가들도 있었다. 나에게 쓴 편지가 아니었음에도 그 편지에 폭풍처럼 무너지고 울고 웃었다. 내가 그들에게 느꼈던 기묘한 친밀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세번째 독자는, 또 다른 나였다.


공개적인 글에서의 '주의'의 대상은 '독자'와 더불어 '이야기'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첫번째 독자의 존재로 인해 '독자' 안에 '이야기'가 포섭된다. 나는 '나'의 진짜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이 말을 꺼낼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정신은 아마 쓰러질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회전하는 팽이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팽이가 그리는 궤적은 아름다운 무늬가 아니라 아무렇게나 그려진 지저분한 낙서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그 낙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면 되니까.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무늬 역시 한때는 낙서였으니까. 그 아름다운 무늬도 각도를 달리해 바라보았을 때엔 낙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제 하나의 점을 향해 팽이를 힘차게 돌려봐야겠다.

'주의'를 기울여 '너'를 잠시라도 웃음짓게 할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본 매거진은 <황진규의 철학흥신소> 브런치의 연재 시리즈 <나의 물질, 나의 기억 III> 및 해당 강의에 대한 후기 입니다.


21화 '결정'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https://brunch.co.kr/@sting762/1343

22화 '주의' 깊게 '생각' 하는 삶

https://brunch.co.kr/@sting762/1344

23화 결정과 균형

https://brunch.co.kr/@sting762/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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