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25)
나의 시각은 운동을 지나간 선분 AB의 형태로 지각하고, 그 선분은 모든 공간과 마찬가지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모든 선입관을 멀리하면 나는 곧바로 나에게는 아무 선택이 없고, 나의 시각 자체가 A에서 B로의 운동을 불가분의 전체로 파악하며, 그것이 무언가를 나눈다면 그것은 지나간 것으로 가정되는 선분이지, 그것이 지나가는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나감은 운동이고, 머묾은 부동성이다. 머묾은 운동을 중단하며, 지나감은 운동 자체와 하나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손이 점 A에서 점 B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점 A에서 정지한 상태에서 점 B에서의 정지한 상태로 이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절대적으로 불가분하다. 우리는 점 A와 점 B로 움직이는 운동을 그 사이의 위치 점들로 분할하고 이 점들의 연합으로 궤적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운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인간의 지각 능력의 한계로 인한 오해라고 말한다. 선분 AB는 무한히 분절할 수 있지만 운동은 그렇지 않다. 운동은 흐름 (지속)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손이 점 A에서 점 B로 이동하는 것을 선분 AB로 지각하는 것은 일종의 선입관이다. 선분 AB 중간의 어떤 점에 머무른다고 상상해보자. 그 순간이 아무리 짧더라도 그 머무름은 부동성이기 때문에 운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운동'은 무엇일까? 베르그손에 따르면 그것은 '지나감' 그 자체이다.
'지나감'. 문득 이 단어를 보고 마음이 멈춰서게 된다. 애틋하고 아련하고 쓸쓸했다. '지나간' 소중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그것을 '추억' 이라고 부른다.
최근 매주 영화 한편씩을 보고 소감을 글로 써내는 수업을 두 달간 들었다. 총 8편의 영화를 보고 16편의 글을 써내야 했다. 수업을 시작했던 날과 끝났던 날이 기억난다.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를 한편씩 보고 다음 일요일이 오기 전까지 그 영화에 대한 글 두 편씩을 쓰는 것이 수업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두 편의 글은 영화를 통해 내 삶을 돌아보는 글이어야만 했다. 그 시간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니 한 점 (시작)에서 한 점 (끝)으로 이동하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그손의 점과 선분에 대한 비유를 보고 8편의 영화와 16편의 글이 '점'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나면 일주일동안 그 영화에 대한 생각에 삶의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영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 영화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는것만 같았다.
영화의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기억이 얽힌 감정까지 함께 주르륵 딸려 올라왔다. 괴롭고 힘들었다.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기억들. 처음 만났고 함께 울고 웃었고 상처를 주고 받았고 이별했던 기억들. 그런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떤 영화를 보고서는 가슴 아래 뼈가 부러진 것처럼 신체적인 고통이 느껴졌다. 어떤 영화를 보고서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악몽을 꾸거나 몇번이고 잠을 깨 밤새 뒤척이곤 했다.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는 마음속에 투명하고 눈이 부신 새하얀 빛들이 가득 찬 것처럼 충만해지곤 했다.
하나의 영화에 머무르며 두 편의 글을 쓰는 것이었지만 결코 '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매주 한 편씩 영화가 쌓여갈 때마다 그 이전의 영화들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새로운 영화들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뒤섞였다. 전 주에서 봤던 영화에서 느껴지지 않던 것이 새로운 영화를 보며 새롭게 느껴지거나 느낌이 변화하기도 했다. 삶에서 마주쳤던 사건들이나 사람들에 대한 감정도 시간이 흐르며 출렁이고 요동치며 바뀌었다. 모호하고 불안하며 혼란스러웠던 감정들이 정돈된듯이 느껴질때도 있었고, 반대로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확신이 없어지고 혼란스러워졌다고 느껴질때도 있었다. 마치 지진이 난 듯한 두 달이었지만, 그 시간이 흐르고 나서 가볍게 부유하며 이리저리 휩쓸리던 마음이 조금은 중심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향곡이나 협주곡은 악장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악장마다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빠르고 경쾌한 느낌, 느리고 서정적인 느낌, 슬프고 절도있는 느낌, 활기차고 힘찬 느낌 등 개별 악장마다 말하고자 하는 바 (주제)가 있다. 그리고 각자의 악장은 앞뒤 악장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 즉, 곡의 흐름 속에 존재하기에 각 악장들의 느낌이 고유한채로 또 하모니를 이루는채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곡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각자의 악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음악을 이루는 것이다. 베르그손의 '운동' 과 '지속' 개념 그리고 최근의 영화 수업을 떠올리며 두 달의 시간들이 8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한 곡의 교향곡처럼 느껴졌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함께 수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고전음악의 경우에는 약 70~80명, 낭만주의 음악이나 현대 음악의 경우에는 약 100명 가량의 연주자가 연주를 한다. 맡은 역할과 개인의 특징의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여도 혼자서는 교향곡의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또 아무리 뛰어난 지휘자나 작곡가여도 그 곡을 합주할 연주자들이 없으면 곡을 연주해 낼 수 없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 관현악단이어도 관객이 없다면 그 곡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발견되지 못할 것이다. 함께 수업을 듣는 동지들, 수업을 지도해주신 스승, 그리고 합주자와 관람객 모두가 있어 두 달간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우리는 '너'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너'는 항상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하고 있는 흐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포착하려 해도 그 찰나의 순간에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는 '진짜'가 아닐 때에만 진짜로 깨닫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추억'은 지나가 버려야만 '추억'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나감' 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씁쓸하고 애틋한 슬픔의 감정이 먼저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지나간 추억에 대한 회한과 후회로 마음이 쓰렸다. 지나가고 나서야만 사랑인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랑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일까? 소중한 것은 반드시 놓치고 마는 것일까? 행복하고 기뻤던 순간도 결국 끝이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놓친것, 지나간 것,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너무 아프니까. 숨이 쉬어지지 않을만큼 밤새 몸부림칠만큼 고통스러우니까.
두 달의 시간들을 길게 늘여두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깨달았다. 나는 그 시간들을 '선분' 처럼 보고 있었구나. 그 시간들을 분절하여 '점'으로 잘라내어 고정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구나. 음악이 연주될 때에만 그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하고 있을 때에만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어느 한 순간에 하나의 조각으로 잘라내어 박제시키려고 했다.
나는 영원한 사랑을 바랐었나보다. '지나가는 너'를 보지 못하고, 아니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버렸었나보다. 추억을 잊고 싶었나보다. 사실은 온 시선을 다해 바라보고 싶었는데. 사실은 잊고 싶지 않았는데.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원히 유예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작별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그 사랑의 기억을 무지개빛깔 포장지로 예쁘게 감싸서 마음 한켠에 소중히 매달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하나의 추억이 하나의 별이 된다. 그 별이 빛에 반짝이고 등불을 밝힐 때 나의 우주는 아름다워지고 따뜻해질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있다. 영원하지 않은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니까. 이제 나는 진짜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이라는 음악 속에서 흐르는 너의 선율을 듣고 싶다. 언젠가 너와 함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날이 오기를. 다시 만날 그 날까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게.
아마자라시, <아름다운 추억>
https://youtu.be/1vrXFC9A2Fw?si=Hb4Smw4vuu1O3Q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