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동', 주짓수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26)

by 홍보경
감각은 그 자체로 내버려두면 실재하는 두 정지 사이에 확고하고 불가분한 전체로서의 실재적 운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분할은 상상력의 작품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에 따르면 '실재적 운동', 즉 운동 그 자체를 보기 위해서는 감각을 그 자체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손이 점 A에서 점 B로 이동하는 과정을 선분 AB 라는 궤적으로 인식하는 경우,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왜곡된 감각으로 분할하여 (점들의 집합)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분할'은 불가피한 실존적인 한계이자 오해의 원인이다. '지속'을 볼 수 없기에 '상상력'을 동원해 한 사람을 '분할' 해서 보는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매일 저녁 주짓수 체육관에 간다. 체육관에서의 일과는 비슷하게 반복된다. 우선 간단한 몸풀기 동작으로 스트레칭을 하거나 애니멀 드릴 (동물의 동작을 모방하는 움직임을 반복하는 것)을 하고, 그 날의 기술 연습을 하고, 마지막으로 5분간 스파링을 서너번정도 하는 것이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나서는 또 관원들과 체력운동을 보충하거나, 스파링을 할 때 막혔던 부분에 대해 연구하거나, 배웠던 기술 혹은 하고 싶었던 기술들을 연마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주짓수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기술' 이다. 드릴을 연습하는 것도, 수업을 받는 것도 스파링을 하는 것도, 체력운동을 하는 것도, 기술을 잘 성공시켜 점수를 획득하여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니까. 주짓수 기술을 처음 배울 때면 특정 순서에 따라 동작을 분절해서 익히게 된다. 그리고 그 기술을 실제 스파링에서 사용해보며 어느 상황에서 이 기술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터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술을 연습하는 상황에서는 차근차근 동작의 순서를 따라가면 그럭저럭 완성이 되었는데 스파링 상황에서는 기술 완성은 커녕 기술을 걸기 시작해야하는 타이밍조차 잡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와 겨루는 상대방 역시 나에게 기술을 걸거나 내가 거는 기술의 카운터 기술을 사용하여 방어하려고 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짓수를 시작한지 2년이 되어간다. 이제 초보 시절 배우는 기본적인 기술들은 왠만큼 써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점점 실력이 정체되며 늘지 않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어려운 기술을 배우면 실전에서 써먹기 어렵거나 항상 사용하는 기술만 사용하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 내가 주짓수를 대하는 마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주짓수를 격투기 운동 중에서 가장 격투기답지 못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기술'이 주짓수의 승패를 가늠하는 요인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기술은 왠지 순수한 '강함' 과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기술을 통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건 진짜 이기는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나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진다. 나는 힘도 약하고, 신체 자체도 강인한 편이 아니며 (오히려 인자약에 가까워서 쉽게 다친다), 체구도 작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리한 신체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격투기 운동은 주짓수이다. 흔히 주짓수를 여성들이 호신술로 써먹을 수 있는 무술이라고 홍보하곤 한다. 여성이 남성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술이라고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주짓수보다 복싱이 더 좋았다. 잽, 원투, 훅, 어퍼컷, 위빙, 더킹 같이 단순한 동작들 몇가지의 조합으로 마치 춤추는 것처럼 싸우는 복서들의 움직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순수하고 정직한 싸움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 직관적이고 순간적인 순발력을 발휘한다는 느낌이 좋았고 나에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주짓수는 비겁하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주짓수를 '몸으로 두는 체스'로 비유하곤 한다. 체스가 무엇인가? 양 선수가 번갈아가며 자신의 말을 이동시켜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체크메이트 상황으로 몰아넣는 쪽이 승리하는 지능적 싸움이다. 이 때 각 선수는 자신의 턴마다 여러가지 경우의 수 중 최적의 경우의 수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두뇌싸움을 펼쳐야 한다. 주짓수도 비슷하다. 이 때 '기술'을 사용하려면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 일련의 순서들을 외워야하고,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간파해 그 약점을 파고들 수 있는 적절한 '기술'들을 떠올려 연계해 나가야 한다. 한 마디로, 나는 주짓수가 기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경우의 수' 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몸'의 직관보다 '지성' 이 먼저 작용한다고 생각했기에 진정한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주짓수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던 이유였다.


그런데 주짓수를 하면 할수록 "주짓수에서 과연 기술이 전부일까?" "(힘과 체력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모든 경우의 수를 익힌다면 어떤 경우에도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짓수 스파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일련의 순서에 따라 습득한 기술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맞다. 패스든, 스윕이든, 서브미션이든, 테이크다운이든, 내 마음대로 상상해서 마구잡이로 움직여서는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초보시절, 스파링을 할때면 나는 내 몸의 본능이 시키는대로 마구잡이로 움직이곤 했다. 한마디로 파닥파닥 거리면서 이리저리 다급하게 움직이기만 했다. 그럴때면 관장님이 해주시는 이야기가 있었다. 기술연습을 할 때에도 일부러 더 천천히 해 보고, 스파링을 할 때에도 조급하지 않게 힘의 흐름을 느끼며 겨뤄보도록 해야한다고.


스파링을 잘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자꾸 기술을 까먹는 내가 답답해서 스파링은 그만둔 채 고수인 관원들의 겨루는 모습만 계속 쳐다봤던 적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기술을 키워드로 집어넣고 유명 선수들의 다양한 상황에서의 시합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다. 같은 기술이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게 되는 상황은 달랐다. 특히나 IBJJF 세계 챔피언십 같이 규모가 큰 대회에 나온 선수들의 움직임은 현재 나의 안목으로서는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했다. 분명히 아는 포지션과 기술인데도 왜 그 기술을 선택했는지, 성공 혹은 실패했는지를 지나서야 사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선수의 신체적 특징에 따라 안될 것 같은 기술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고, 우연히 순간적인 힘이 맞아떨어지거나 비겨서 생각지도 못한 기회로 의외의 기술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승리의 개연성이 높은 직전과 직후의 상황들이 존재했지만 그 상황에 도달하기까지는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가 있었다.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다면 그건 더 이상 '경우의 수'가 아닌 것 아닐까?


주짓수에 대해 생각하면서 철학 수업 시간에 종종 듣곤 하던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떠올랐다. 사실 그 전까지 나는 인공지능이나 딥러닝 같은 주제에 관심이 없었다. 더욱이 바둑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주짓수 선수들의 시합을 보면서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치룬 5국의 대전 중 유일하게 이세돌이 승리했던 4국에서, 처음으로 알파고의 승률이 50% 미만으로 떨어졌던 이세돌의 백 78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 수를 둔 이유는 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다른 수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고. 그가 두었던 78수는 판세를 뒤집은 '신의 한 수' 라고 불리운다. 알파고가 계산한 승률로는 0.007% 밖에 되지 않는 확률의 수였다. 이세돌이 그 수를 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응축되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직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알파고가 무수한 기보를 학습하고 모방하여 가장 승률이 높은 수를 계산한 경우의 수


그 상상력의 역할은 바로 밤에 번개 치는 장면을 밝히는 순간적인 섬광처럼,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움직이는 상들을 고정하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의무교육과정과 대학 그리고 대학원 교육과정, 나아가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가장 필요한 사고 능력은 논리적인 사고력이었다. 대학원 시절 동물실험을 할 때 특히 그랬다. 가설설정을 하고 그 가설을 검증하는 연역적 추론을 통해 연구가 이루어졌다.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 통계분석을 진행하고 이를 위해서 수학적 회귀 모델을 사용했다. 이 때 모델에는 연구자가 그 영향력을 실험하고자 하는 독립변인, 실험에 영향이 없도록 고정시켜주는 통제변인, 실험의 결과값으로 도출되는 종속변인, 그리고 오차 (예측불가능한 변수)를 넣고 설계하도록 배웠다. 내가 했던 실험들은 비교적 간단한 실험이어서, 종속변인은 여러개여도 두 개 이상의 독립변인(요인, factor)을 가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두 종류의 요인만 되더라도 각 요인당 수준의 수에 따라 많은 처리의 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종류의 커피 (아메리카노, 라떼)와 3종류의 사이즈(스몰, 미디움, 라지)에 따른 카페인의 효과를 측정한다고 가정할 때, 실험해야하는 커피의 개수는 총 6개이다]. 처리의 수가 많아질수록 실험의 규모가 커진다. 실험을 수행하는 표본집단이 모집단을 대표하려면 처리당 용인되는 최소 반복의 수가 통상적으로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동물실험의 경우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비용과 시간이 증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요인의 수가 많아질수록 각 요인별로 영향을 주는 상호작용 (위의 예시에서는 커피의 종류와 사이즈 사이의 상호작용. 예를 들어, 아메리카노와 라떼의 차이점은 ‘물’과 ‘우유'라는, 희석하는 액체의 종류이다.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해 아메리카노는 '라지' 사이즈를 마셨을 때 가장 카페인의 효과가 높을 수 있지만 라떼는 '우유'와 '카페인'의 상호작용 때문에 '미디움' 사이즈에서 가장 효과가 높을 수도 있다)을 분석하기 어려워진다.


실제 환경과 다르게 환경을 통제해놓고 몇 가지 되지 않는 독립변인을 가지고 그 효과를 실험하는 것, 분산분석의 가정 (독립성, 등분산성, 정규성), 평균을 통계적으로 비교하기에 개별값들의 단독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 요인들간의 수학적인 관계 (직선, 2차, 3차.. )만을 분석한다는 것, 그리고 모델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을 '오차'라는 상수에 집어넣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석사과정 수준이어서 그랬겠지만, 내가 했던 연구는 알파고 연구팀처럼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 (제품이든 영양소이든)의 최적의 급여량을 알아보는 경우밖에 없었다. 그랬으니 실험 설계와 가설 자체도 그 경향성이 어느정도 예측 가능한 범위내에 있었고, 간혹 예측하지 못한 결과 (주로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종속변인이었던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가 나올 경우에도 그에 대한 고찰을 적어내기에 어렵지 않았다. '오차'라는 상수에 예측불가능한 변수를 모두 퉁쳐 놓았으니, 그것에 대한 설명도 상이한 실험조건에서 해당 독립변인과 종속변인에 대한 설명할 수 있을만한 결과를 가져와 설명하게 되면 돌다리를 열계단 정도 건너 목적지에 도달하듯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과정이 다른의미에서 '소설' 처럼 느껴졌다. 마치 논리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논리적인 사고에 굉장히 약한 사람이다. 수학과 과학 (그 중 물리학이나 화학 등 법칙과 규칙을 이해하고 응용해야 하는 과목)을 특히 어려워했고 언어 영역에서도 논리적인 글을 가장 읽기 어려워했다. 철학을 배울 때에도 논리적인 검증 과정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스승이 요약해 준 핵심 메시지만 이해하곤 했다. 글을 쓸때에도 논리적인 글보다는 내 마음이 가는대로 쓰는 글을 좋아한다. 그래서였는지 모든 것을 '논리'와 '효율'로 생각해야만 하는 일과 직업이 힘겹게만 느껴졌다. 숫자와 확률로 생명을 일률적으로 표현한다는 개념 자체가 흡사 차가운 칼날의 감촉을 불러일으켰다. '나' 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이 점차 두둥실 떠올라 대기권 밖으로 태양계 밖으로 우리은하 밖으로 그 너머로 사라지는 것 같은 공포감을 들게 했다.


나는 논리 = 지성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마음대로 이해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래서인지 '반지성주의자'라는 베르그손의 철학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베르그손의 철학책에서 '몸의 논리'라는 말을 읽고 무척 놀랐다. '논리'라는 건 무조건 '정신' 혹은 '지성' 이랑만 연관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것도 사실 '주짓수'였다. 아직 복싱 초보 수준의 나에게 복싱이라는 운동은 '무지성으로 많이 때리고 잘 피하는 운동' 정도로만 러프하게 인식되어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주짓수는 스파링을 하기 위해서는 초보라 할지라도 무조건 기술을 익혀야만 한다. '논리'를 '지성'의 작용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내가 주짓수에 반감을 가지는 것은 사실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분할은 상상력의 작품이고 마치 섬광처럼 우리 일상적 삶의 움직임들을 순간적으로 고정한다. 우리는 움직이는 상을 번개가 치는 그 순간에만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덕스러운 '너' 앞에서 때로 혼란스러워지곤 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몽환적으로 인식한다. 마치 클럽에서 섬광처럼 반짝이는 불빛에 사람들이 비춰 보이듯이 말이다. 주짓수 수업을 들으며 기술을 걸기 위한 '순서'를 쪼개서 연습하는 건, 인간의 불가피한 한계 때문에 '분할'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술을 익히기 위함인 것이다.


요즘 들어 왜 주짓수 선수들의 시합 영상이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알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영상을 홀린듯이 보고 있다보면 그들의 움직임이 서로의 몸을 타고 흐르는 유체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나도 스파링을 할 때면 상대방의 몸을 파도처럼 타고 이동한다는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관장님이 천천히 기술을 연습해보라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야만 힘의 흐름과 몸의 자연스러운 법칙들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스파링을 하고 있을때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의 스파링을 지켜볼때도 그렇고 그 시간만큼은 생생히 깨어있으면서도 흐름 속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고보니 내가 좋아하는 '몸'의 움직임들은 모두 '흐름' 속에 있었다. 드럼도, 복싱도, 수영도, 서핑도, 요가도, 운전도, 모두 그 움직임만의 독특한 흐름이 있다. 언어와 지성으로는 재현해낼 수 없는 흐름. 그 순간들이 '운동'이자 '지속' 그 자체 아닐까?


미국 지부장님과 함께 나간 주짓수 대회에서


연속적인 점들은 결국 상상적 머묾에 불과하다. 당신은 경로를 궤적으로 대체한다. ... 그러나 어떻게 진행이 사물과 일치하며, 운동이 부동성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주짓수를 단순히 '연속적인 점' 들의 집합이자 궤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지금보다 더 주짓수 초보시절, 무지성으로 스파링을 하다가 많은 부상을 당했다. 팔꿈치 인대가 파열되기도 했고, 복싱으로 인해 안좋았던 어깨는 유착성 관절낭염으로 고생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복싱으로 인해 안좋았던 발목은 부주상골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다. 고질적인 무릎 힘줄염은 가드를 열심히 하는 날이면 뻐근하고, 손가락 10개 중 두세 손가락 인대는 항상 기본으로 다쳐있는 상태다. 요가와 복싱을 할 때 잘못된 자세의 콜라보로 경추와 흉추에 누적된 데미지로 인해, 인버티드 가드나 리커버리를 한창 하고 나면 밤에 잘 때에도 경추와 어깨가 지끈거려 끙끙거리곤 한다.


번개가 치면 하늘에 섬광이 번쩍인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섬광' 이전에도 '운동'이 일어난다. 이를 들뢰즈는 '어두운 전조'라고 이름 붙였다. 어두운 전조는 구름 속에서 번개가 치기 전에 발생하는 미약한 전기 방출 현상을 의미한다. 즉, 어떤 현상이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미세하고 감지하기 어려운 징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상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은 이렇게 무지성으로 운동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부상을 당할때만 해도 내가 왜 부상을 당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잘 떠올려보니 결정적인 부상을 당하기 이전에 그 '어두운 전조'가 분명히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서브미션 탭을 치기 전까지 버티다가 다친 경우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팔꿈치 인대가 파열되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마운트 포지션을 하고 있는 상대방을 밀어내려다가 팔꿈치를 지나치게 쭉 뻗어 상대방의 무릎이 마치 암바를 하듯 팔꿈치를 꺾었던 것이었다. 어깨가 부상이 누적될 때에는 터틀가드같은 포지션에서 상대방이 내 몸 주위를 빠르게 움직일 때 상대방의 다리를 잡으려다가 어깨가 꺾이거나, 바닥을 안좋은 각도로 짚은 상태에서 상대방의 체중이 실리는 경우가 많았다. 무릎이 다칠 때에는 버터플라이 가드를 나보다 무거운 상대에게 무리해서 고수하거나, 서로의 다리가 얽혀있는 상태에서 무릎이 바깥쪽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몸을 회전 (레그리핑)했던 경우가 많았다.


격투기 운동을 어느정도 진지하게 혹은 열심히 하다 보면 사실 부상은 건너 뛸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복싱에 비해 주짓수는 자잘한 부상의 위험이 높다. 격하게 스파링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잠깐 방심한 순간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는다. 내가 다니는 체육관에서도 몇주 걸러 한두명씩은 꼭 부상을 입는 사람들이 생긴다.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고 오랜 기간 쉬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 스스로도 부상을 겪으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보면서, 다칠 것 같은 상황이 되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복싱은 트라우마를 몸에 심는 운동이다" 라고 했던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스승이 했던 말을, 트라우마라는 기억을 통해 더 기쁜 방법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진정한 복싱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면 주짓수도 마찬가지다. 아니, 사실 삶도 그렇다. 인간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니까. 나는 그동안 참 부주의하게 살아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만큼 나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냈다. 그만큼 몸에 많은 트라우마가 심겨져 있을것이다. 그것이 아마 사랑과 타자 앞에서 자꾸만 주저하게 되었던 이유였던것 같다.


부상 후 예전보다 방어적으로 플레이하게 되었지만 스파링을 할 때면 여전히 이기고 싶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마음과 자세로 스파링에 임하고 싶다. 내 몸을 적당히 보호해가며 이길 수 있는 수를 준비하고 또 생각하며 주의깊게 수를 내는 것. 그러다가 던져야 한다는 직감이 올때면 두려워하지 않고 던질 줄 아는 것. 나는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지금 시점에 베르그손과 주짓수와 이세돌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흐름이 좋다. 흐르는 것에 몸을 맡길 때 행복하다. 이제 '삶'이라는, '너'라는 흐름에 올라타 보아야겠다.


관장님과의 스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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