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27)
II. 실재 운동들이 있다.
수학자는 상식의 관념을 더 큰 정확성을 가지고 표현한다. 이 때문에 위치를 좌표들이나 축들로부터의 거리로, 운동을 그 거리의 변화로 정의한다. 따라서 그는 운동에 대해 길이의 변화밖에는 알지 못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실재 운동은 실재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즉 어떤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상대적 운동과 구별된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힘이라는 말의 의미에 관해 합의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힘은 질량과 속도의 함수일 뿐이다. 그것은 가속도에서 측정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 철학을 배우며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은 모든 물질은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 눈앞의 핸드폰도 책도 모두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로 인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궤적'일 뿐 '운동' 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운동을 모두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베르그손이 말하는 '실재 운동' 이란 무엇일까?
베르그손에 따르면 수학적 혹은 물리학적인 운동은 실재 운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운동을 어떻게 정의했을까?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학자와 과학자들은 뉴턴의 고전 역학을 통해 운동을 이해하려고 했다. 뉴턴은 1687년 출판한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물체의 운동과 힘에 대한 정의, 운동 법칙, 운동법칙을 적용한 물체들의 운동에 대한 분석, 중력법칙과 운동법칙을 적용한 천체들의 운동 분석에 대하여 정리해 놓았다. 인간이 일상에서 겪는 여러가지 운동들에 대해서는 뉴턴의 고전 역학을 통해 대부분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연에서의 운동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바로 '빛'이었다.
뉴턴은 빛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프리즘 실험을 통해 빛은 서로 굴절률이 다른 여러가지 색깔(파장)을 가진 빛들의 연합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볼록렌즈 대신 오목렌즈를 사용하여 색수차가 없는 광학망원경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빛이 입자라고 생각했다. 빛에 비추었을 때 지는 그림자에 테두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00년대 들어서 점점 빛이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라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토머스 영이 수행한 이중 슬릿 실험에서 빛이 파동의 성격을 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기파에 대한 파동방정식을 연구한 맥스웰은 전자기파의 속력이 그 때까지 실험을 통해 알아낸 빛의 속력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일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빛이 파동이라면 그 파동을 전파시켜줄 매질이 있어야 했다. 과학자들은 빛을 전파시켜주는 매질을 '에테르'라고 부르며 이 '에테르'를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을 통해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불어 빛의 속력은, 광원의 속력이나 관찰하는 계의 운동 속도와 상관없이 공간에 대해 항상 일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힘, 운동량)이 공간에서 일으킨다고 간주되는 운동에 의해서만 그것은 알려지고, 평가된다. 그것은 그런 운동과 연계되어 있으므로 그것의 상대성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므로 절대적 운동의 원리를 그와 같이 정의된 힘에서 찾는 물리학자는 그들 체계의 논리에 의해 그들이 앞서 피하기를 원했던 절대 공간의 가정으로 되돌아온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 수업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이 자주 언급된다. 최근의 현대 과학은 기존의 고전 물리학과 다르게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고 인정한다. 나는 현대 물리학에서의 운동이 『물질과 기억』에서 비판하는 그 '수학적 운동' 및 '물리적 운동'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베르그손이 언급했듯, '절대 공간의 가정' 속에서의 '운동'은 '실재 운동'이 아닌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 대해 공부하다가 재미있는 역사를 알게 되었다. 1922년 파리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열린 프랑스 철학회에서 있었던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의 논쟁이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1905년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이어 1915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상태였다. 아인슈타인이 떠오르는 신성이었다면 베르그손은 당대에도 이미 유명했던 철학자였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베르그손의 철학도 '시간'을 주요 화두로 다루고 있었으니 두 사람간에 첨예한 토론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강연에서 원래 베르그손은 발언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였던 에두아르 르 루아가 '시간'에 대한 스승의 의견을 물으며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 사이의 논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논쟁은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다. 사실 베르그손은 이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비판하는 『지속과 동시성』 이라는 저서를 집필 중이었고 당일 발언한 사람 중 가장 길게 발언을 했다고 한다.
(운동이 있다면) 운동을 단순한 관계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절대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물체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밝힌 논문에서 “한 계에서 동시적인 사건도 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운동하는 다른 계에서 관찰할 때에는 동시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지구에서 사건 A와 B가 '서로 거리가 있는 위치'에서 '동시'에 발생할 때, 날아가고 있는 우주선에서 이 두 사건을 관측하면 '시차를 두고' 발생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지구에 대해 상대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우주선에서의 시간이 느려지며 공간이 수축하기 때문이다. 운동은 상대적이기에,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우주선에서 '서로 거리가 있는 위치'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 A와 B를 관측해도 마찬가지로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계 (지구 혹은 우주선)를 관찰하고 있는 계 (혹은 정지하고 있는 계) 로 상정하고 관측을 하느냐에 따라, 관측하는 계는 상대적으로 운동하고 있으므로 시간이 느리게 가게 된다.
베르그손은 『지속과 동시성』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비판한다. 원문은 찾아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운동의 상대성', '시간의 느려짐', '시간'을 '공간'의 한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그는 에테르의 존재를 밝히기 위한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관측하는 계의 속도에 상관없이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실험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으며 상대성 이론과 상충되는 부분에 대해 설명한다. 베르그손은 두 계 (지구와 우주선)에서의 서로 다른 운동을 측정할 때 측정자가 있는 계는 운동하지 않는 계가 되기 때문에 두 계의 운동은 '상호 대체 가능'하며 '운동상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운동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하는 '시간의 느려짐'은 실제로는 어느 쪽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베르그손은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쪽이든 관찰하는 계(정지한 계) 혹은 관찰 당하는 계 (운동하는 계)가 될 수 있으므로, '시간의 느려짐'과 '시간이 느려지지 않음' 이 하나의 계에서 동시에 체험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공간이 확장되거나 수축된다는,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시공간의 관계를 부정하며 시간과 공간은 독립적이라고 주장한다. 베르그손에게 중요한 것은 실재하는 '시간', 즉 '지속'이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동시성'은 지각을 전제로 한다. 그는 '사건의 동시성' 이 '지각의 동시성'과 연속적일 뿐만 아니라 후자로부터 전자가 유도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 두 가지가 독립적이고 별개이며, 베르그손이 그와 같이 생각한 이유는 빛의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빛의 신호나 시계의 도움이 없이는 지각만으로는 사건의 동시성의 판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건도 지각도 "심적인 구성물이자 논리적인 존재들"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철학자들의 시간이란 없습니다. 물리학자의 시간과 다른 심리적 시간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아인슈타인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면서, 1922년 12월 심사위원회 좌장은 선정의 변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베르그손의 이론에 도전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에 아인슈타인은 강연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서 『지속과 동시성』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평을 일기로 남긴다. 그 일기에서 아인슈타인은 베르그손이 자신의 상대성 이론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고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지도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베르그손의 철학이 심리적 실재와 물리적 실재라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는 베르그손이 실재 자체를 사유의 구성물로 보고 이것을 객관화 했다고 여겼다. 사실 베르그손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이원론자로 볼 수 있으므로 아인슈타인의 평가는 어느 정도 합당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짧은 생각이지만 '실재 자체를 사유의 구성물로 보고 이것을 객관화 했다'는 물질이 기억이 되고 기억이 물질이 되는, 베르그손의 철학의 미묘한 지점을 아인슈타인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했던 생각이라고 어렴풋이 추측해본다.
『지속과 동시성』은 1931년 6판을 찍은 후 이후로는 출간이 중단된다. 이후 베르그손은 사후에도 재출간을 금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베르그손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논쟁에서 상대적으로 패배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인슈타인도 인정했듯이, 그리고 베르그손도 후에 재출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듯이, 나는 두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결국 베르그손이 말하는 '실재 운동', 즉 '운동 상의 차이 없음'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근간이 되는 '상대성 원리'를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대성 원리'는 등속도로 운동하는 관성계 (특수 상대성 이론) 혹은 가속하거나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계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관측자에 따라 다르게 경험될 수 있지만 물리 법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 계에서 다른 계를 관측할 때 '시간의 느려짐'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계에서는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속'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만의 시간의 흐름으로 살고 있으며, 내가 아닌 타자의 시간을 통해서만 나의 시간을 상대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 뿐, 나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는지 빨리 흐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사실 빠르고 천천히 흐르는 절대적인 시간은 없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속', 즉 기억하는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아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상처를 주거나 서로 갈등이 생겨 다투고 또 어긋나곤 한다. 그 이유는 나의 세계와 상대방의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서이다. 아무리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해도 나의 감정에 휘둘려 타자는 이해 불가한 존재 혹은 짜증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과학과 철학에서 입증되었듯이 각자의 세계는 그 자체로 모두 실재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성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개별성을 통해 또 다른 개별성 안에 존재하는 개별성, 즉 보편성에 더 집중한다면 우리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과 베르그손이 말하는대로 '운동' 그 자체가 '실재'라면, 자연 법칙이 각자의 세계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나의 감정이 작동하는 원리대로 너의 감정 역시 작동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기억이 없어서이거나 (각자 처한 자연 조건이 국소적으로 일치하지 않아서이거나), 나의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상대방의 세계와 나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동일한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거나 일 것이다.
얼마 전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후기를 쓰는 수업을 들었다. 이 수업에서는 영화 당 두 편의 글을 써내야 했는데, 한 편은 내가 느낀 바를 적는 것이고 다른 한 편은 나를 제외한 타인이 적은 감상평을 보고 그의 입장에서 다시 감상평을 써내는 것이 규칙이었다. 타인에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나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는 이질적인 타인일수록 더더욱 그러했다. 더 깊이있게 읽어내거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의 마음에서도 나의 마음과 동일한 성질의 어떤 조각들을 발견하게 됐다. 가령, 완전히 동일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유사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 아주 근사하게라도 그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다. 나의 기억에서 작동하는 자연 법칙이 상대방의 마음에서도 작동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베르그손의 지속의 절대성도 모두 맞는 말이었다. 베르그손의 지속을 마음에 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타고서 너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공간은 실재 운동이 자리 잡는 지반이 아니다. 반대로 공간을 자신 아래에 놓는 것이 실재 운동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양자역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양자 얽힘' 이라는 현상이 마음에 들어왔다. '양자 얽힘'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중첩' 현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중첩'이란 양자의 물리 시스템이 동시에 여러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중첩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등장하는 실험은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다. 슈뢰딩거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을 통해 '중첩'이 허구임을 밝히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증거가 되고 말았다. 고양이와 청산가리를 함께 상자안에 두었을 때, 상자를 열어보지 않을 때까지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기이한 결론을 이 실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빛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기도 하다는 것이 '중첩'을 의미하기도 한다. 빛의 입자성은 흔히 '관찰자 효과'라고도 알려져 있는 실험에 의해 입증되었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스크린에 나타나는 간섭무늬에 의해 빛은 파동임을 알 수 있지만, '측정' 하는 어떤 존재가 그 과정을 관찰하게 되면 빛은 파동에서 입자로 결정되어 하나의 입자만이 슬릿을 통과해 스크린에 하나의 위치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인다. 관찰하지 않았을 때 스크린에 나타나는 줄무늬의 짙고 옅음은 해당 위치에 양자가 존재할 확률을 의미한다. 확률이라는 말은 측정이 되기 전에는 그 모든 위치에 존재할 수 있다는 '중첩'의 상태를 내포한다. 양자의 특성은 측정될 때까지 결정되지 않으며 측정 행위로 인해 가능한 상태 중 하나로 붕괴된다. 즉, '관측' 이라는 행위 (혹은 관측자의 존재 자체로 인해 야기되는 어떠한 변화)가 양자의 상태를 순간적으로 결정해 버린다는 뜻이다.
'양자 얽힘'은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두 입자가 양자적으로 서로 얽혀있다면, 한쪽의 정보를 아는 순간, 다른 쪽의 정보도 동시에 결정된다는 현상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파동이 입자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확률에 의존한다는 사실과 이 양자 얽힘의 현상을 근거로 들어 양자 역학이 역설적이라고 생각하며 비판했다. 그는 양자 얽힘 현상에서 하나의 얽힌 입자쌍의 특징이 결정되는 순간 동시에 시간의 오차 없이 다른 입자쌍의 특징이 결정되는 것은 두 입자쌍 사이에 어떤 정보의 교환이 일어났기 때문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두 입자 사이에 소통이 일어났으리라 추측한 것이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질량을 가진 존재는 빛보다 빠른 속도를 가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양자 역학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 양자 역학에서의 얽힘 현상이 '웜홀'을 통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연구가 발표되면서 미시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 역학과 거시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웜홀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직까지 없지만,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다고 보여진다. 예상되는 웜홀의 형태는 블랙홀 두 개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블랙홀은 별이 중력에 의해 쪼그라들어 어떤 한계 지점에 도달하면 형성되는 특이점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질량을 가지는 물체는 중력을 만들어내며 공간은 중력에 따라서 휜다.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넘어가게 되면 중력이 매우 강해져 빛조차 탈출할 수 없으며 시공간이 무한히 왜곡된다. 빅뱅 이론과 비슷하게, 블랙홀 역시 운동 자체가 공간을 형성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입증이 필요한 이론이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양자 얽힘 현상을 두 쌍의 양자 사이에 순간적으로 아주 좁은 웜홀이 생성되어 정보가 동시적으로 교환된다고 말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로 이루어진 웜홀을 통한 항성간 이동을 다룬다. 약 10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와 최근 다시 봤을 때엔 꽂히는 장면이 달랐다. 첫번째 생명체의 생존 가능성이 있던 행성인 '밀러의 행성'에서 주인공 쿠퍼와 브랜드 박사는 부서진 밀러의 신호 송신기를 발견하고 어마어마한 파도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한다. 상대성이론에 따라 밀러의 행성에서의 1시간은 지구에서의 7년에 해당하기에 그곳에서 지체한 시간으로 인해 지구에서의 시간은 약 23년정도가 흘러가 버렸다. 인듀어런스호로 복귀한 쿠퍼는 23년동안 지구에서 보내져 온 영상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아들의 연애, 결혼, 자녀의 출산, 아내의 죽음, 장인어른의 죽음, 그리고 딸 머피의 23년간의 침묵과 단 한 번의 원망의 메시지를, 23년의 시차를 지나서 본다.
나는 쿠퍼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것 같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때엔 이미 그들의 시간이 나를 앞질러 지나가 버렸다. 한때는 그 사실이 못내 사무치고 한스러웠던적도 있었다. 그러나 베르그손의 철학을 공부하며, 모든 '운동'은 '지나감' 그 자체라는 것을, 내가 만나는 '너'는 영원히 지나가 버린 어떤 '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현재 그 자체는 과거와 미래와 함께 존재할수밖에 없다. 23년이라는 시차는, 흐름을 조금 더 길게 늘여 인간이 의식할 수 없을만큼, 끊어질듯 가늘어진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은 연결되어 있다.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희미해지고 끊어질 듯 가늘어졌던 시간조차도, 블랙홀 내부에서 쿠퍼의 '현재'가 쿠퍼와 머피의 '과거'가 되듯, 또한 그 '현재'가 결국은 '과거'를 뚫고 '미래'가 되듯,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흐르면서 흐르지 않는 것이 된다.
쿠퍼는 후회하고 있다. 브랜드 박사가 자신과 그의 딸을 속여, 결국은 지구와 인류를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우주 여행에 동참했지만 결국 가족을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구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마지막 인사를 조금 더 따뜻하게 했더라면. 머피가 말했던 모스부호의 메시지를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NASA의 좌표를 알아내지 않았더라면. 희망이 사라진 순간 그는 그가 했던 과거의 선택 모두를 모조리 후회한다. 몸부림치고 절망하고 좌절한다. 지구에 남은 인간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블랙홀 내부로 들어가 그곳의 양자 데이터를 지구로 전송하여 머피에게 중력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르강튀아의 지평선 너머로 뛰어든다.
"그들은 무한한 시공에 접속할 순 있지만 아무것에도 묶여있질 않아. 그래서 3차원의 세상과 소통 못 하는 거지. 내가 머피에게 전할 방법을 찾아내겠어. 이 순간을 찾아낸 것처럼."
"어떻게요?"
"사랑이야, 타스. 브랜드가 옳았어. 머피에 대한 나의 사랑. 그게 열쇠야."
- 영화 『인터스텔라』 쿠퍼와 타스의 대화 중에서
'사랑할 조건'이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할 조건'을 만든다. - 황진규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뒤 그가 도착한 곳은 시간과 공간이 무수하게 쪼개지고 뒤틀려서 존재하는 어떤 큐브 공간이다. 그곳에서 그는 과거 딸 머피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을 보게 된다. 어긋난 순간들. 그 절망적인 순간들 속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생각한다. 뭔가 할 수 있는게 있을거야. 그 순간 인공지능 로봇인 타스가 한 말이 가슴에 꽂힌다. "과거를 바꾸라고 그들이 우릴 데려온 게 아니예요". 그리고 깨닫는다. 과거 머피가 '유령'이라고 불렀던 존재 - 책을 떨어뜨려서 모스 부호로 "STAY"라는 메시지를 보냈던 존재, 흙먼지로 이진법으로 된 NASA의 좌표를 알려주었던 존재 - 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시계 초침에 모스 부호로 변환된 양자 데이터를 심는다. 과거를 바꾸지 않고 현재를 바꾼다.
웜홀을 통과해 다른 세계로 빠져나온 쿠퍼는 100년가량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주에서 발견된다. 딸 머피는 이미 할머니가 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다.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유령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던 아버지 쿠퍼는 딸에게 다시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랙홀과 죽음을 넘어 딸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병원에서 쿠퍼와 재회한 머피는 그에게 그만 떠나라고 한다. 우주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브랜드 박사에게 가라고 말한다. 기다림. 겨우 만났는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머피가 시계를 가지러 오지 않으면요?"
"올 거야. 반드시 와"
"어떻게 장담하죠?"
"내가 준 시계거든"
- 영화 『인터스텔라』 쿠퍼와 타스의 대화 중에서
"아무도 제 말을 안 믿었죠. 하지만 전 아빠가 돌아오실 걸 알았어요"
"어떻게?"
"아빠가 약속했으니까요"
- 영화 『인터스텔라』 머피와 쿠퍼의 대화 중에서
"우린 모두 기다리죠. 무엇인가를. 전 평생 무언가를 기다렸죠. 사실은 평생 동안 기차역에 서서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인생은 단지 기다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요. 중요하고 진짜인 무언가에 대한 긴 기다림 말이예요."
- 영화 『희생』 오토의 독백 중에서
너를 만났는데, 이제서야 겨우 만났는데, 너는 나보고 떠나라고 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를 기다림 끝에 또 다른 기다림이 있다. 한 번의 만남. 무한한 기다림. 우리는 평생 기다리며 살 수 밖에 없는걸까? 사랑의 순간은 잠깐 뿐인걸까? 10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에는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브랜드 박사를 찾으러 떠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뒤 다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끝없는 기다림, 그리고 그 기다림동안 나와 함께할 유일한 동료인 고독함이 보여 섵불리 우주선을 띄우지 못할 것만 같았다.
머피도 쿠퍼도 100년 이상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몇 분간의 잠깐의 만남 후 서로에게 작별을 고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머피는 중력 방정식을 풀어 쿠퍼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쿠퍼는 죽어가는 머피, 그리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 시간들 동안 하루도 빼놓지않고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너를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들을 해 왔던 것이다. 보이지 않더라도, 만날 수 없어도, 몇십년간의 시차를 통해 이미 지나가버린 너의 환영밖에 잡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원망과 외면 자책과 후회 속에서도, 그 무수히 많은 어긋남 속에서도. 너는 나를 믿었고 나는 너를 믿었다.
어쩌면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양자 얽힘'이란 현상은 사실 '사랑' 아닐까? '너'와 '나' 를 서로 이끌리게 하는 중력이 뭉쳐지는 곳, 블랙홀 (어둠, 빛)과 블랙홀 (어둠, 빛)을 통해 연결된 사랑. 시간이 0이 되는 사랑. 그리고 0이라는 시간을 통해 만날 때에만, 네가 어떤 형태로 결정되는 순간 너에게 얽혀 있는 나 역시 그와 대칭적으로 어떤 형태로 동시에 결정되는, 그 때에만 서로를 느낄 수 있는 사랑. 베르그손이 말하는 '역 원뿔 도식'에서 '습관기억'은 '행동'으로 맺힌다. 사랑의 '순수기억'이 중력이라는 무수한 기억들로 모여서 하나의 순간으로 맺히는 것. 사랑의 순간. 너와 내가 만나는 순간. 너의 원뿔과 나의 원뿔이 꼭짓점을 맞대고 마주하는 순간. 그 때 생성되는 웜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영원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것 아닐까?
양자는 중첩되어 있다. 미시세계의 이론을 거시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양자들의 집합이므로, 나의 상태 역시 중첩되어 있을 것이다. 즉, '너의 곁'과 '너의 곁이 아님' 의 상황은 중첩되어 있다. 나는 안에 있음과 동시에 바깥에도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는, 나의 자리는 '너'가 결정한다. 결국 자리는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너'를 찾으면,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꽃이 된다. 이제 너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나의 블랙홀과 너의 블랙홀이 맞닿아 있다면, 우리들의 그 '사건'의 지평선을 넘을 수 있다면, 암흑은 암흑이 아니다. 시간이 0이 되는 무한한 순간이다.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기다림에 불과한 삶이 아니라 기다림 뿐이어서 기쁜 삶임을. 사건의 지평선 너머 너에게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