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영토를 찾아서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28)

by 홍보경
내 눈이 나에게 운동감각을 줄 때 그 감각은 실재이며, 한 대상이 내 눈앞을 이동하든 내 눈이 대상 앞에서 이동하든 뭔가가 실제로 일어난다. 더 강한 이유로, 내가 운동을 일으키기를 원한 후 그것을 일으키고 근육감각이 그것에 대한 의식을 가져올 때 나는 운동의 실재성을 확신한다. 그것은 운동이 내 속에서 상태의 변화 또는 질의 변화로 나타날 때 그 운동의 실재성이 손에 잡힌다고 말하는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실재 운동은 한 사물의 이동이라기보다 한 상태의 이동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에 따르면 '실재 운동'은 '한 사물의 이동'이 아니라 '한 상태의 이동' 이다. 거리, 질량, 속도 등이 늘거나 줄어드는 수학적 물리학적 운동은 '한 사물의 이동', 즉 양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이것은 '실재 운동'이 아니다. 반면,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그것이 나에게 운동감각을 주고 그로 인해 나의 몸의 근육감각이 그것에 대한 의식을 불러 일으킬 때 우리는 '한 상태의 이동', 즉 질적인 변화를 느낀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질적인 변화만이 '실재 운동' 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한 친구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친구는 내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감했다. 여태까지 누군가에게 능동적으로 책 추천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책을 읽다가 몇몇 친구들이 떠올라 추천해 준 적은 있어도, 반대로 한 사람을 앞에 두고 그를 위한 책을 추천한 적이 거의 없었다.


무슨 책을 추천해 주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그 친구의 현재 고민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호감을 갖고 있기는 했어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함께하는 동안 운동하며 몸을 부대끼던 시간이 대부분이라 대화를 하더라도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많았다.


친구는 마음이 조금 힘들어 보였다. 지칠때면 책을 읽곤 했다며 요즘도 그런 상태라는 듯한 표현을 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책을 만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면서 위로 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나도 그런 느낌을 느껴본 적이 있어서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무엇이 그 친구를 힘들게 하는걸까, 물어 보려다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실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또 우리 사이가 그 정도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깜깜한 안개 속에서 더듬거리다가 겨우 주섬주섬 내가 마음이 힘들 때 읽었던 책 몇 권을 추천해 주었다.


그 작은 사건이 마음에 남았다. 책 추천을 부탁했다는 것은 어떤 책이 자신에게 필요한 책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친구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잘 모를수도 있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더라도 어떤 책이 가장 좋은 답변을 줄 수 있는지 모를수도 있다. 친구와 비슷한 느낌을 언제 느꼈는지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그림과 미술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고 어떻게 그림을 감상해야 하는지 몰라 헤메곤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 (피카소, 마티스, 고흐, 모네...) 등의 그림을 봐도 그냥 많이 봐 왔던 그림이라는 생각만 들 뿐 예술적 가치가 있는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었다. 또 철학을 배우다 보면 그림과 화가가 심심지 않게 등장하곤 하는데, 철학자들이 그림의 예술성에 대해 철학적 개념을 빗대어 가며 설명을 해도 좀처럼 와닿지 않을 때가 많았다.


철학 공동체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 중에 미술치료사로 일하며 미술관 도슨트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마음이 힘들 때마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미술이 어떻게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던 친구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했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명의 화가와 그의 그림과 엮어 한 꼭지씩 글로 풀어냈다. 어떤 그림을 보았을 때 어떻게 그 예술가와 감응하였는지 그녀 나름의 감정과 사유의 흐름을 적었다. 그 글을 읽고 그녀의 삶, 화가의 삶, 그리고 나의 삶이 맞물리면서 그림이 나에게로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친구의 글 덕분에 '아 그림은 이렇게 보는 거구나' 하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떠올려보면 친구가 추천해 주었던 전시에 가서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던 적도 있었고, 내가 썼던 글을 읽고 친구가 보내준 그림에 마음이 울렁거렸던 적도 있었다. 마치 친구와 나의 색깔이 어우러진 추상화 같은 배경으로 우리가 함께 느린 춤을 추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전엔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추천해준 김선두 화가의 전시를 보러 갔었다. 평소의 나라면 관심이 없을 그림이었지만 그녀의 소갯말에 홀리듯이 찾아간 전시였다. 친구는 토종 맨드라미와 붉고 커다란 벼슬을 가진 장닭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을 이야기 해주었다. 서울에서 자란 나는 그녀만큼 자연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농장생활을 할 때 많이 보았던 닭들과 옥수수밭과 농장 옆 논밭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 역시 전시를 보면서 최근에 보았던 영화와 나의 글 그리고 철학 수업의 내용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녀는 요즘 그림이나 글을 보면 작가가 어느 나이대쯤 그 작품을 만들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고 했다. 그녀는 김선두 화가처럼 나이를 잘 먹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본 나는 한낮 뙤약볕 정중앙을 뚫고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걸까. 너무 밝고 뜨거우면 어둡게 느껴질수도 있다는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친구의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 날 그림 이야기를 하며 친구의 손맛이 가득 담긴 김치찌개를 먹었다. 찌개가 맛있어서 밥을 배부르게 많이 먹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도 몸도 포동포동 부풀어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살아온 환경도 시대도 많이 달랐지만 그림 속에서 만나고 있었다. 별, 맨드라미, 풀, 벌레, 과자 봉지 사이의 느슨한 중력을 느끼며 서로의 곁을 유영하듯 맴돌고 있었다.


친구와 나의 유영




살아가면서 그림을 숱하게 보아 왔다. 길거리에서 카페에서 책에서 가방이나 컵 같은 소품의 프린팅 무늬에서. 그 유명한 모나리자와 천지창조 그림도 길게 늘어선 줄까지 서 가며 보았다. 그러나 그 많은 그림들은 그저 의미없는 소음처럼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나의 마음을 울리는 그림들은 모두 나에게 의미있는 친구들이 추천해주거나 그들이 좋아했던 그림들이었다. 그 그림들은 하나의 그림으로만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그림, 또 다른 영화, 또 다른 책, 그리고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촉발시키곤 했다. 베르그손의 말처럼, 그것들이 "나에게 운동감각을 주고 그로 인해 나의 몸의 근육감각이 그것에 대한 의식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었다. 아무리 많은 양의 그림을 보았어도 ('한 사물의 이동' 혹은 '양적인 변화'로서의 그림 감상) 마음의 움직임과 실제 삶에서의 행동 ('한 상태의 이동' 혹은 '질적인 변화')을 일으킨 그림들은 오로지 친구들을 관통하여 나에게 닿은 그림들이었다.


책 추천을 부탁 받은 일과 일상의 몇몇 사건들을 둘러싸고 내가 하나의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유용함을 줄 수 있을까?". 그 고민을 하며 나는 진짜 선물을 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미있는 선물을 한다는 것, 유용함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양적인 변화보다는 질적인 변화를 촉발하는 선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태까지 내가 했던 선물들은 아무리 너그럽게 쳐줘봤자 양적인 변화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니 나의 선물이 그 사람에 가닿았을리 없고 그의 실제 삶을 더 기쁜 방향으로 밀어줄 수 있었을리가 없었다.


좋은 책을 추천해주기 위해서는 책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그 친구가 뭘 좋아하는지, 현재의 문제가 뭔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야 하는지), 최소한의 사랑의 관계 (믿음과 신뢰)가 되어야 한다.


미술치료를 하는 친구와 그림을 그리는 친구는 그림과 심리상담이라는 분야에서 자신의 영토(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려면 해당 분야에서 꽤 긴 시간 머물며 실제 결과물을 거둬야한다. 아마 그것이 누군가에게 유용한 선물을 할,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것이다. 에토스가 없는 사람의 말과 가르침은 누구도 믿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 친구들은 적어도 다른 사람에 비해 그 분야에서 '질적으로' 더 높은 안목과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 되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해 내가 얼만큼 알고 있고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두 번째 문제가 된다. 얼마 전 친구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다가 나는 내가 아닌 사람에게 제대로 운동을 가르쳐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는 물을 무서워하고 물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데, 나는 어려서부터 물을 좋아하고 수영을 좋아했다. 내가 자연스럽게 되는 몸 동작을 친구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게다가 그 친구는 나보다 몸이 크고 무겁고 덜 유연한 편이었다. 내가 아닌 몸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 아무리 내 느낌대로 설명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상대방의 삶이 실제로 나아질 수 있는 실용적인 도움을 주는데에 있어서는 헛발질을 하곤 했다. 그 이유는 나의 영토(세계) 없음, 그리고 주의를 기울여 상대방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의 부족 (베르그손 식으로 표현하면, '8자 도식'의 허술함) 때문이었다. 헛발질은 '양적인 변화'이자 '한 사물의 변화' 일 뿐,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내지는 못한다. 애석한 것은 헛발질 자체에도 적지 않은 에너지가 든다는 것이다. 나의 문제는 그 에너지 소모 자체만으로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했다고 느끼고 서운해 하거나 내가 준 것이 많다고 착각하곤 했다는 것이었다. 마치 매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직장일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위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짜 그 사람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 지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유튜브로 수영 강습 영상을 찾아보고 최근 수영장에 다녔을 때 배웠던 기억을 되짚어보니, 내가 아무런 체계 없이 막무가내로 느낌의 조각들만 친구에게 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거기에 그렇게까지 노력을 쏟아붓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의 수영에 대한 기술과 전문성이 부족하고, 또 그 친구에게 그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삶에 대해 성찰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부주의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내리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직하게 생각해보면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그것이 기쁨이 될지 슬픔이 될 지 깊은 마음 속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알면서도 불행한 삶을 향하는 선택을 반복하게 되었을까?


슬픈 삶도, 기쁜 삶도, 어느 한 순간에 동전 뒤집듯 뒤바뀌지 않는다. 미세한 기울기로 조금씩 기울다가 변곡점을 지나는 순간 방둑이 터지듯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혹은 행복한 삶이 덮쳐오는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기울기를 슬픔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매순간 섬세하게 살피고 사유해야 하는 과정을 제대로 해내지 않았다. 이미 슬프기로 결정된 삶인 것처럼 살았다. 사유하지 않아서 슬픔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이미 슬픔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사유하기를 포기했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성찰하고 사유하는 힘이 극도로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질적인 변화를 이루게 할 진짜 '선물'을 주기 위해서는 나부터 질적인 변화를 이뤄내어야 한다. 우선 내 삶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갈 때, 즉 자연스러운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살 때 가장 기쁜 삶을 살 수 있다. 기쁜 삶의 가장 첫 시작점은 내가 뿌리 내리고 가꿔갈 나만의 영토(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의 영토(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몇 년 전 철학자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강독 수업을 들으며 '영토'에 대한 개념을 들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해 우리의 잠재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배웠던 것 같다. 그 당시 영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엔 동그란 원 하나만이 떠올랐다. 그 원의 내부가 나의 영토이고, 외부가 너의 영토이고, 원은 너와 나를 구분하는 테두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르다. 하나의 단일한 원 대신 배아들이 뒤엉켜 있는 비누거품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나의 영토는 '질적 변화'를 추동하는 '너'들로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분절해냄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분절은 '너'들과 만났을 때 느껴지는 감정들을 맑은 눈으로 구별해 낼 때 일어난다. 내 마음과 감정의 결을 최대한 세밀하고 정교하게 내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며 내가 가장 크게 기쁨을 느끼는 세포(거품 덩어리)는 가장 큰 크기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욕망으로 발아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분열된 배아 덩어리가 영토의 한 조각인것이 아닐까? 세포와 세포를 가로지르는 막에는 너의 자취가 남아있다. '너'라는 칼로 잘라냈으니까. 그것이 우리의 테두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너'라는 또 다른 분열된 비누거품이 '나'의 비누거품에 뒤엉켜 함께 뭉클거리고 떨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형상 자체가 나-너-우리의 영토의 모습이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보다 슬픔으로 기울어져 있는 삶의 기울기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하며 근원적인 방법은 나에게 유의미한 '너'가 내가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것이다. 다시 돌고 돌아 믿음의 문제다. 너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믿을 때 나는 진짜 기쁨을 향한 세포 분열을 시작할 수 있다. 진정으로 유용한 선물을 하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해야했던 것은 나의 삶의 기울기를 기쁨 쪽으로 조금씩 기울여가는 것이었다.


이미 슬픔의 형상으로 분열되어 있는 나의 비누거품이 못나 보여서 싫었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건 내가 기뻐지길 바란다는 '너'의 말이니까. 지금 당장 나에게 소중한 '너'들의 삶을 바꾸려면, 유용한 선물을 하려면, 나는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질적인 변화를 이뤄내야만 한다. 그 때가 되면 흉측해 보이던 나의 모습도 불타는 맨드라미 한 송이로 피어날 수 있는 씨앗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진짜 나에게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허공에 흩어져 버릴 것처럼 나부끼던 몸과 마음이 글을 씀으로써 이 땅에 내려앉는 것 같다. 써야 할 글들을 치열하게 써 나가봐야겠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그 친구의 마음에 닿을만한 책을 한 번 더 고민해 봐야겠다. 좋아하는 운동을 함께 오랫동안 즐겁게 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홀로 있는 밀실과 함께 하는 광장을 잘 오고 가야겠다. 순간순간 멈춰 서서 나의 기쁨과 슬픔을 면밀히 살펴 보아야겠다. 나에게 기쁨과 유쾌함을 주는 것들로 삶을 채워가고 싶다. 이제 나는 기쁨을 향한 분열을 해 나가고 싶다. 그렇게 나의 세계를 열어가고 싶다.


나의 영토를 찾아서


본 매거진은 <황진규의 철학흥신소> 브런치의 연재 시리즈 <나의 물질, 나의 기억 III> 및 해당 강의에 대한 후기 입니다.


29화 때로 '침묵'은 강렬한 '운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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