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부상'은 강렬한 '운동'이 된다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29)

by 홍보경
한 소리가 다른 소리와 다른 것처럼, 소리는 침묵과 절대적으로 다르다. 빛과 어둠 사이, 색깔들 사이, 색조들 사이에 차이는 절대적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행도 또한 절대적으로 실재적인 현상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소리들과 색깔들 그리고 색조들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 즉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도'와 '레'는 질적으로 다른 음이고 '빨강'과 '파랑'은 질적으로 다른 색이라는 듯이다. 이는 이들이 각자 서로 다른 '실재 운동'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의아하게도 '소리'와 '침묵' 그리고 '빛'과 '어둠'도 질적으로 다른 '실재 운동' 이라고 말한다. 얼핏 생각하면 '침묵'과 '어둠'은 운동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침묵'도 '어둠'도 모두 '실재 운동'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부상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일년 넘게 끌고 온 부상이 잘 낫지 않기 때문이었다. 야금야금 운동을 계속 해 온 것이 화근인 것 같아 지금은 복싱을 쉬고 주짓수 스파링을 쉬고 있다. 격기 운동에 있어서 '침묵'이자 '어둠' 을 맞이한 셈이었다. 운동을 하지 않으니 몸이 근질근질하고 답답하고 우울하기도 했다. 그만큼 건강한 육체가 내 삶에서 얼마나 큰 기쁨을 주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진부하고 어리석은 말이지만 잃어봐야 소중함을 아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헬스장에서 재활을 목적으로 근력 운동을 하고 있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면서 나는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근육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섬세하지 못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를 잃더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그래야 다음 소는 더 잘 보살필 수 있을 테니까. 때로는 자유롭게 움직였던 과거를 떠올리며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그건 내가 지금의 침묵이자 어둠의 상태가 '운동 없음' 의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을 잘 보내서 더 즐겁고 유쾌하게 운동하기 위한 '실재 운동'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렇듯 섬세하지 못한 몸의 논리는 비단 육체적인 부상만을 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나의 삶에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상을 입었다. 한 사람과 어긋나게 되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어둠과 침묵 속에 잠기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진짜 소중함은 어둠과 침묵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진짜 중요한 '실재 운동'은 침묵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시간만이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긋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찰할 수 있는 절박하고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옛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는다는 말이 있다. 부끄럽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만나왔다. 사귀던 애인과 이별을 맞이하면 바로 다른 사람을 만나곤 했다. 왜 그랬을까? 이별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잊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나와 함께했던 존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되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늘 비슷한 식으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곤 했다.


나와 같은 양상은 아니지만,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후에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던 친구를 알고 있다. 그 친구와 함께했던 즐거웠던 기억이 많지만 그가 그 기억들 중 많은 부분들을 지워버릴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 때가 있다.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올 것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으니까. 그때가 오면 그 친구도 나도 서로 침묵과 어둠 속에서 우리의 만남이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아픔이 너무 고통스럽더라도 고개 돌리지 않고, 부디 잊지 말고, 꾹꾹 기억해내서 더 기쁜 삶을 살 수 있는 하나의 빛으로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이 작디 작은 먼지같은 마음만큼은 휘몰아치는 원망과 고통의 폭풍을 뚫고 진심으로 그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 편으로는 질,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순수 양 사이에 차이는 없앨 수가 없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그러나 문제는 바로 실재 운동들 사이에 양적 차이만이 나타나는지, 아니면 그것들이 말하자면 내적으로 진동하며 빈번히 계산할 수 없는 어떤 수의 순간들로 자신의 존재에 리듬을 줌으로써 그 자신이 질 자체임을 아는 일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정신-물질'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양'과 '질' 사이의 차이를 없앨 수 없다고 한 말은 그의 이원론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여기에서 '정신'은 '질'이고, '물질 (신체)'은 '양'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원론은 전통적인 이원론과는 다르다. '양'과 '질'은 분명히 다르지만, '양적 차이'는 내적으로 '진동'하며, 그 때마다 일일이 계산할 수 없는 순간들로 그 자신의 존재에 '리듬'을 줌으로써 '양' 자체가 바로 '질'이 된다. 특정한 양적 차이 (빛의 진동수 차이)가 질적 차이 (색깔)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중했던 사람이 내 곁에서 멀어졌을 때에야 뒤늦게 어둠의 구덩이가 깊게 패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어둠은 그야말로 '질' 적으로 차이나는 이별들이었다. 나는 그걸 어떻게 느낄 수 있었을까? 살아가면서 처음 겪어 보는 다른 차원의 슬픔과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슬픔과 고통은 '마음'의 상태이기에 '정신'의 변화였지만 그건 그 사람의 부재로 인해 촉발된, 내 삶에서 마주하는 여러가지 '물질'들의 '양'적 차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어떤 장소를 가도, 무슨 노래를 들어도, 맛있는 걸 먹어도, 기뻐도 슬퍼도 그 사람이 생각나서 모든 물질들에 그 사람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즉, 그 사람이 부재함으로 인해 변화된 내 삶에서의 순간순간들이 "계산할 수 없는 어떤 수의 순간들로"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내적으로 진동"하게 된 것이다. 그 내적 진동이 나에게 슬픈 "리듬을 줌"으로써 슬픔과 고통이라는 마음의 '질' 적 차이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이전의 이별들이 내 삶에 작은 양적 변화를 야기했다면 진정으로 소중했던 한 사람과의 이별은 큰 양적 변화를 야기했고 그로 인해 질적으로 다른 고통을 불러 일으켰다. 완전한 침묵과 어둠은 소리와 빛과는 질적인 차이를 의미하지만 그건 양적인 차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아무도 양과 질의 관계를 다르게 표상하지는 않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그렇다면 한 사람과의 어긋남은 단번에 일어나는 것일까? 어긋남이 질적인 변화라면 그건 단 한 순간에 마법처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손의 말처럼, '정신(질)'과 ‘물질(양)'은 '진동(운동, 리듬)'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와의 관계가 어긋났다면, 그건 꽤 오랫동안 나의 몸(물질)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그 사람의 몸과 그를 둘러싼 물질들에게 슬픔(정신)을 주는 시간(양)들이 쌓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건 슬픈 파형의 동기화 같은 현상인 것이었다. 내 삶이 슬픔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점점 미세한 기울기로 그 사람과의 관계 역시 슬픔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양'적인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별, 어긋남이다.


부상을 어떻게 치유해야할까? 몸의 부상을 치유하는 방법이 몸의 논리를 천천히 그리고 섬세하게 익혀가는 것이듯이 삶의 부상을 치유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치명적인 부상은 더 긴 시간 공을 들여가며 섬세하게 치유해야할 것이고, 만성적인 부상은 내 삶의 근본적인 방향성을 치유해야 할 것이며, 부상이 예상되는 지점에서는 예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모든 방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내 몸과 마음에 있다.


나는 글을 쓸 때 산만하고 부유하던 정신이 차분히 가라앉는다고 느낀다. 글을 쓸 때 가장 고요하게 내 마음을 돌아보고 사유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너와 나의 마음을 알고 싶다. 소설가들은 인간의 마음을 세밀하게 분절시킬 줄 아는 사람들인 것 같다. 나는 그들처럼 내 마음을 세밀하게 분절해서 나의 몸의 논리를 더 정확하게 알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더 적게 상처주고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소설이란 무엇일까? 나는 여전히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 소설이 쓰고 싶어진다. 어둠에 잠겨 있는 너의 세계를 통과하여 나의 세계로 빛을 내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있어 소설의 의미이다. 침묵과 어둠의 시간들 속에 잠겨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밝게 빛나는 별들이 있다. 어두울수록 별은 밝게 빛나니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 한자락을 좇아가본다. 언젠가 '너'가 나에게 '빛'과 '음악'이 될 때를 기다리면서.



본 매거진은 <황진규의 철학흥신소> 브런치의 연재 시리즈 <나의 물질, 나의 기억 III> 및 <나의 물질, 나의 기억 IV> 해당 강의에 대한 후기 입니다.


<나의 물질, 나의 기억 III> 29화 때로 '침묵'은 강렬한 '운동'이 된다.

https://brunch.co.kr/@sting762/1358

<나의 물질, 나의 기억 IV> 02화 '양'적인 '운동'은 곧 '질'적 차이다.

https://brunch.co.kr/@sting762/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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