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인 ‘운동’은 곧 ‘질’적 차이다.

‘물질’과 ‘정신’, ‘양’과 ‘질’

이제 ‘양’과 ‘질’의 관계성을 통해 ‘실재 운동’에 관해서 설명해 봐요. ‘실재 운동’은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죠.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행을 갔다고 해봐요. 이때 ‘실재 운동’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한 거리(양)가 아니라,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과정을 통해) 분주함에서 차분함으로 변하는 ‘질’적인 변화죠. 즉 특정한 국면이 전환되며 발생하는 질적 전이가 바로 ‘실재 운동’이죠. 그렇다면 이때 ‘양’과 ‘질’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한 편으로는 질,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순수 양 사이에 차이는 없앨 수가 없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먼저 베르그손은 ‘질’과 ‘양’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둘의 차이를 없앨 수가 없다고 말해요. 이는 ‘정신-물질’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에요. ‘정신-물질’의 관계는 ‘질-양’의 관계와 동일하죠. ‘질’은 ‘정신’으로 포착되고, ‘양’은 ‘물질’로서 포착되잖아요. ‘분주함’과 ‘차분함’이라는 ‘질’적 차이는 오직 ‘정신’(마음)에서 포착되는 것이고, ‘서울’과 ‘부산’ 사이의 ‘양’적 차이는 오직 ‘물질(도시-해변)’로만 포착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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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인 ‘운동’은 곧 ‘질’적 차이다.


그런데 베르그손의 이원론은 전통적 이원론과는 조금 달라요. 무엇이 어떻게 다른 걸까요?


그러나 문제는 바로 실재 운동들 사이에 양적 차이만이 나타나는지, 아니면 그것들이 말하자면 내적으로 진동하며 빈번히 계산할 수 없는 어떤 수의 순간들로 자신의 존재에 리듬을 줌으로써 그 자신이 질 자체임을 아는 일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분명 ‘양’과 ‘질’의 차이는 없앨 수 없죠. 그런데 베르그손은 ‘양’이라고 여기고 있는 ‘운동’이 사실은 ‘질’이라고 말해요. 우리는 ‘질’과 ‘양’이 다르다고 생각하죠. ‘질’은 ‘감각’하는 것이고, ‘양’은 ‘계산’하는 거잖아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깔이 있어요. 색깔은 분명 ‘감각’되는 ‘질’이죠. 그런데 사실 색깔이라는 것은 ‘계산’되는 ‘양’이예요. 빛의 진동수(양)에 따라 빨주노초파남보(질)로 드러나는 거잖아요. 즉 ‘양(빛의 진동수)’적인 ‘운동’이 곧 ‘질’(색깔)적인 차이로 드러나는 거죠.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걸까요? 이는 특정한 ‘양(빛의 진동수)’적인 차이가 “내적으로 진동하며 어떤 수의 순간들로 자신의 존재에 리듬을 줌으로써 그 자신이 질 자체(색깔)”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죠. 이 난해한 설명은 우리의 마음 상태로 설명하면 이해가 조금 더 쉬워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여행을 간다고 해봐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사이에 수많은 ‘상’들이 ‘운동’(진동)하겠죠. 빌딩 숲에서 바다로 풍경도 변할 것이고, 탁한 도시 바람에서 신선한 바닷바람으로 공기도 변할 테죠. 이것은 분명 ‘물질’ 즉 ‘양’적인 차이죠. 그런데 그 ‘양’적인 차이는 “계산할 수 없는 어떤 수의 순간들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내적으로 진동”하게 되죠. 그 내적 진동이 “우리의 존재에 리듬을 주게” 되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음(질) 상태가 전환되는 거죠. 이처럼 ‘양’적으로 변하는 ‘운동’이 어떤 리듬을 가진 ‘질’적인 상태로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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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과 ‘물질(양)’은 ‘진동’을 매개로 연결된다.


‘정신(질)’과 ‘물질(양)’은 분명 다르죠. 하지만 ‘정신(질)’과 ‘물질(양)’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죠. ‘정신(질)’과 ‘물질(양)’은 ‘진동(운동)’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돼요. ‘양’(물질)도 ‘진동(진동수)’이고, ‘질(정신)’도 ‘진동(파형)’이죠. 이 둘은 서로 다른 ‘진동’이기에 때문에 서로 분명히 구별되지만, ‘양(빛의 진동수)’적인 차이로 발생하는 특정한 ‘진동(파형)’이 곧 특정한 ‘질’적 ‘진동’(색깔)으로 드러나게 돼요.


진실을 말하자면, 아무도 양과 질의 관계를 다르게 표상하지는 않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양’과 ‘질’은 분명 다르지만, 그것은 내적인 상태일 뿐이에요. “진실을 말하자면, 아무도 양과 질의 관계를 다르게 표상(생각)”할 수 없어요. 빛의 진동수(양)와 그 진동수가 만들어내는 파형(질)은 다르죠. 하지만 이는 내적인 상태일 뿐이고, 외적으로 표상될 때는 특정한 형상(색깔·소리)로 드러날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실재 운동(진동)’을 통해 “어떤 수의 순간들(양)”이 (존재에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곧 “질 자체”가 되기 때문이죠.


‘빨강’과 ‘파랑’, ‘음악’과 ‘소음’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죠. 그런데 이 ‘질’적인 차이는 가시광선 혹은 가청주파수라는 ‘진동’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잖아요. 이는 ‘양(물질)’과 ‘질(정신)’은 ‘운동(진동)’으로 매개되어 같은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의미하죠. 이것이 베르그손 이원론의 독특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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