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무엇인가?
베르그손은 인간(생명체)의 욕구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구분되는 대상을 비추는 빛다발이라고 하죠. 이것이 모든 생명체의 '지각' 방식이죠. 베르그손은 이러한 '지각' 방식을 통해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요.
이와 같이 감각적 실재성으로부터 잘려진 부분들 사이에 매우 특별한 관계들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는 ‘운동’인 세계를 고정하고 분할해서 ‘물질’로 감각하죠. ‘공기구나’ ‘물이구나’, ‘음식이구나’ 등등으로 말이죠. 이것이 “감각적 실재성”이에요. 이 “감각적 실재성으로부터 잘려진 부분(공기·물·음식·섹스·영화…)”들이 있죠. 이 “부분들 사이에 매우 특별한 관계를 세우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삶이 뭔가요? 호흡하고,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섹스를 하고, 극장을 가고, 더 나아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여행하는 일련의 일들의 연속이죠. 이는 매 순간의 ‘욕구’(빛다발)가 공기, 물, 음식, 섹스, 영화, 너, 낯선 곳을 비추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죠.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잘려진 부분들”이죠. ‘빛다발’을 비추는 부분 이외에는 어두운 상태니까요. 이 “잘려진 부분들 사이에 매우 특별한 관계를 세우는 것”이 바로 삶인 거죠. 비유하자면, 흐릿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 초점을 잡아 선명하게 찍은 사진(이미지)들을 이어 붙인 영화가 바로 그 자신의 삶인 것이죠.
삶을 잘 산다는 것
이제 우리는 ‘삶을 잘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죠. ‘삶을 잘 산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세계’(운동)를 보며 산다는 것이겠죠.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 번째 분할은 직접적 직관보다는 훨씬 더 삶의 근본적 필요에 답하는 것이라면, 그 분할을 더욱더 밀고 나감으로써 어떻게 사물에 대해 더 근접한 인식을 얻을 것인가?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이 말하는 “직접적 직관”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운동)를 보는 일이죠. 그런데 이런 ‘직관’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우리는 ‘운동’을 고정하고 분할해서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것이 우리가 “직접적 직관보다는 훨씬 더 삶의 근본적인 필요(생존)에 답”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잖아요.
평범한 이들은 ‘실재 운동’ 상태인 세계를 볼 수 없어요. 자신의 ‘욕구’에 따라 특정한 대상에게 ‘빛다발’을 비춰서 연속된 세계(운동) 중 일부를 고정·분할(‘물질’화)해서 볼 수밖에 없죠. 흔한 삶이란 그 고정·분할(‘물질’화)된 부분들을 이어 붙인 것일 뿐이죠. 그런데 이렇게 사는 걸 잘 산다고 말할 수 없죠. 숨 쉬고, 물 먹고, 밥 먹고, 섹스하는 사진을 이어 붙인 영화가 좋은 영화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삶을 잘 살려면, “분할을 더욱더 밀고 나감으로써 사물에 대한 더 근접한 인식을” 얻어야 하죠. 쉽게 말해, 최대한 많은 곳에서 ‘빛다발’을 비춰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운동)에 더 육박해 들어가려고 해야죠. (욕구에 따라) 먹음직스러운 사과만 보는 게 아니라 사과를 있게 한(아니 사과 그 자체인) 흙, 나무, 햇살, 비, 농부까지 보는 일이죠. 그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과가 어떤 것인지 점점 더 잘 알게 되겠죠.
그렇게 분할을 더욱더 밀고 나가다 보면 삶은 달라지죠. 생존적 혹은 자본적 ‘욕구(필요)’에 의해서 음식과 돈에만 ‘빛다발’을 비추는 삶을 넘어 인간적 ‘욕구(필요)’의 대상(우정·사랑·그림·음악·영화·시…)까지 ‘빛다발’을 비추는 삶을 살게 되겠죠. 바로 이것이 바로 삶을 잘사는 것이죠. 먹고 자고 싸는 이미지만 이어 붙인 영화보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이미지가 이어지는 영화가 더 좋은 영화인 것처럼 말이에요. 이는 ‘직접적 직관’에 이르러 ‘공진’ 중인 ‘실재 운동’을 세계를 볼 때 가능한 일이죠.
‘욕구’의 ‘이미지’들 너머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삶을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원론적인 논의죠. 이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논의해 봐요.
물질의 이론은 바로 우리의 욕구에 전적으로 상대적인 이 일상적인 이미지들 아래서 실재를 재발견하려 한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이 우선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이 이미지들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는 ‘운동’을 고정·분할해서 ‘물질’로 지각하죠. 이러한 ‘물질’, 즉 먹음직스러운(믿음직스러운·섹시한) 빨간 사과(너)는 우리의 욕구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이미지일 뿐이죠. 이는 “우리의 욕구에 전적으로 상대적인 일상적 이미지”, 즉 ‘허상’일 뿐이죠. “물질의 이론”을 따르는 우리는 이 ‘허상’ “아래서 실재를 재발견하려” 하죠.
사과의 ‘실재’는 ‘흙-나무-비-햇살-농부…’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동’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운동’ 그 자체를 보기보다 “물질의 이론”에 따라서 빨간 사과라는 “일상적 이미지(허상) 아래서 실재(운동)를 재발견하려” 하죠. 이것이 우리가 ‘실재 운동(흙-나무-비-햇살-농부…)’을 보지 못하고 ‘허상’(빨간 사과)을 실재라고 믿는 이유죠. 그러니 ‘실재 운동’을 보기 위해서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겠어요? 이 ‘일상적 이미지’(허상)를 벗어나야겠죠. 이 ‘일상적 이미지’ 아래서는 ‘실재(운동)’을 보기보다 ‘실재(운동)’을 ‘물질’로 재발견하려고 할 테니까요.
하나의 결여를 채워 더 많은 세계를 비추는 삶
‘실재 운동’을 보려면, ‘욕구’가 촉발하는 ‘일상적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야 해요. 쉽게 말해, 사과(너)를 볼 때, 먹음직스러운(믿음직스러운·섹시한) 그래서 내가 먹을(의지할·섹스하고 싶은) 사과(너)라고 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사과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배가 고픈데, 어떻게 빨간 사과를 먹음직스러운 사과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속세를 등지고 떠난 수행승처럼 ‘욕구’를 벗어던져야 하는 걸까요? 이는 근본적인 해법이지만 현실성이 없죠. 속세 속에 사는 우리는 모든 ‘욕구’를 벗어던진 수행승처럼 살 수 없으니까요. 현실적으로 삶을 잘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삶의 태도가 있어요.
‘결핍을 채운다!’ 있는 그대로의 사과(운동)를 보려면, 먼저 허기(결핍)를 달래야 해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결여와 결핍이 있어요. 이는 외모일 수도 있고, 가난일 수도 있고, 학벌일 수도 있죠. 우리가 더 많은 대상에 ‘빛다발’을 비추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결핍 때문이죠. 이들은 결핍을 채우지 못했기에 자신 혹은 타인의 외모·가난·학벌만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 결핍을 스스로 충족시켜야 해요.
이건 누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결여가 외모라면 힘껏 외모를 가꿔봐야 하고, 결여가 가난이라면 힘껏 돈을 벌어봐야 하는 거예요. 학벌이 결여라면 지금이라도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하는 거예요. 그 결여를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다음 대상에게 빛다발을 비출 수 없을 테니까요. 하나의 결여를 채워서 점점 더 많은 세계를 비추며 사는 것. 이것이 현실적으로 삶을 잘사는 방법일 거예요.
‘무분별’의 세계
그렇게 결핍을 하나씩 채워 점점 더 많은 대상에게 ‘빛다발’을 비추게 되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운동)를 볼 수 있게 되겠죠. 그렇게 보게 되는 ‘실재 운동’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는 힘이 물질화되고, 원자가 관념화되며, 이 두 항이 하나의 공통적 경계로 수렴하고, 이렇게 해서 우주가 자신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가 세계를 ‘구별(분할·분별)’하는 최종지점에서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정신’과 ‘물질’의 ‘구별(분할·분별)’이죠. 우리가 많은 대상에게 ‘빛다발’을 비추어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정신(힘·관념화)’과 ‘물질(원자·물질화)’의 ‘구별’은 마지막까지 남을 거예요. ‘욕구’를 넘어 (사과라는 ‘허상’이 아닌) ‘흙-나무-비-햇살-농부…’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봐요. 이것들은 모두 자연물, 즉 ‘물질’이잖아요. 이러한 ‘자연물(물질화·원자)’들이 결국은 ‘힘’이자 ‘관념화’인 ‘자연(정신)’에서 왔다는 사실은 좀처럼 보기 어렵죠.
우리가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많은 대상에게 ‘빛다발’을 비추면, 끝내는 “힘(자연)이 물질화(자연물)되고, 원자(자연물)가 관념화(자연)”되어 “이 두 항이 하나의 공통적 경계로 수렴”하는 상태(운동)를 보게 돼요. “이렇게 해서 우주가 자신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게 돼요. 즉 ‘정신’과 ‘물질’이 “공통적 경계로 수렴”해서 ‘실재 운동’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보게 되는 거죠.
해탈=무분별=‘실재 운동’
‘삶을 잘 산다’는 건 바로 이 하나의 세계를 보며 산다는 걸 의미할 거예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함께 ‘진동(운동)’하고 있는 ‘공진’ 상태를 보는 것이죠. 불교에서 ‘해탈’(종교적 최고 상태)을 ‘무분별’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분별’의 상태로 세계를 보는 것은 분할된 세계를 보는 것일 뿐이죠. ‘물질’과 ‘물질’뿐만 아니라,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마저 넘어 ‘무분별’의 상태로 세계를 보는 것, 이 상태를 ‘해탈’의 경지라고 말하는 걸 거예요. 이는 곧 ‘실재 운동’을 보게 된다는 의미죠.
세계를 ‘실재 운동’으로 혹은 ‘무분별’의 상태로 보는 이들이 있죠. 이들은 ‘자연(힘·관념화)’이 ‘자연물(물질화·원자)’을 만들고, ‘자연물(물질화·원자)’이 곧 ‘자연(힘·관념화)’을 보는 이들이죠. 즉 “우주가 자신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는 이들이겠죠. 어떤 경지에 이른 종교인, 예술가, 철학자들이 그런 이들일 거예요.
세계를 ‘무분별’로 보는 이들이 삶을 더 잘살까요? 세계를 ‘분별’의 상태로 보는 이들이 삶을 더 잘 살까요? 우리가 작은 일에도 분노하고 싸우며 일상에서 늘 조바심을 내며 사는 이유가 뭔가요? 그것은 ‘너’는 ‘나’와 다른 사람이며, ‘우리(공동체)’는 ‘나’와 상관없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 아닌가요? 이것이 우리가 삶을 잘 못사는 근본적인 이유 아닌가요?
반면 모든 ‘분별’을 넘어 끝내 ‘정신’과 ‘물질’의 ‘분별’마저 넘은 이들은 삶을 잘 살 거예요. 이들에게는 ‘나’와 ‘너’, ‘나’와 ‘우리(공동체)’의 구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런 이들은 필연적으로 더 온화하고, 더 너그러우며, 더 여유롭게 살게 되겠죠. ‘너’와 ‘우리’는 결국 ‘나’와 연결되어 ‘운동’ 중이란 사실을 너무나 선명하게 보고 있으니까요. 삶을 정말로 잘 살려면 ‘실재 운동’으로 점점 육박해 들어가, ‘무분별’의 세계에 이르려고 해야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