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응축’을 만들고, ‘응축’은 ‘지각’을 만든다.
모든 생명체는 감각 능력의 한계로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한 ‘운동’(진동)을 ‘응축’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무한한 ‘운동’(진동)으로서의 세계를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기억’은 무한한 ‘운동’을 ‘응축’하기 위한 도구인 거죠. 그래서 ‘기억’이 중요한 거예요. ‘기억’은 세계를 ‘질’적인 차이로 파악하기 위한 도구죠. 이러한 사실은 의미심장한 세계의 진실 하나를 알려주죠.
빨간색이 ‘빨강’인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인간으로서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빨간색을 ‘빨강’으로 지각하는 것일 뿐이에요. 박쥐에게 그것은 빨간색이 아닌, 그 어떤 다른 형태의 ‘질’로 포착될 거예요. 박쥐는 초음파로 세계를 지각하기 때문이죠. 박쥐가 초음파의 형태로 세계를 지각하는 건, 박쥐로서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생명체의 ‘기억’은 (무한한 ‘운동’을 압축할 수 있는) 특정한 ‘응축’ 체계를 만들고, 그 ‘응축’ 체계를 통해 특정한 ‘지각’ 체계가 형성되는 거예요. 생명체마다 ‘지각’이 다른 이유는 저마다 ‘기억’이 다르기에 ‘응축’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박쥐는 못 보는 걸 인간은 볼 수 있고, 인간은 못 보는 걸 박쥐는 볼 수 있는 거죠. 쉽게 말해,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지각’ 체계를 가지기 때문에 각자의 세계 속에서 사는 거죠.
모든 이는 저마다의 세계에 산다.
‘가시광선’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요. 가시광선은 시야가 가능한 광선이라는 뜻이잖아요. 이는 너무 인간 중심적인 단어 아닌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 가시광선이라고 말해야죠. 강아지 가시광선, 두더지 가시광선, 물고기 가시광선은 없잖아요. 인간이 그렇게 보는 거잖아요. 우리가 ‘빨간색’으로 지각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갖고 고유한 ‘기억’ 때문일 뿐이죠.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지각’ 체계를 가지기 때문에 각자의 세계 속에서 사는 거죠. 이에 대해 인지 생물학의 거장 마뚜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죠.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로 마뚜라나
생명체는 세계의 관찰자들이죠. 흔히 우리는 하나의 세계가 있고, 다수의 관찰자가 그 세계를 지각(관찰)한다고 여기죠. 그래서 한 생명체가 죽으면 하나의 세계 속에서 그 생명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잖아요. 마뚜라나도 베르그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이기 때문에, “관찰자의 소멸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을 의미”하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관찰자가 본 세계가 있고, 박쥐라는 관찰자가 본 세계가 있는 거예요. 인간이 죽을 때는 인간의 세계가 소멸하는 것이고, 박쥐가 죽을 때는 박쥐의 세계가 소멸하는 거예요. 각자 저마다의 ‘지각’ 체계를 통해 구성한 세계를 갖는 것이니까요. 이는 아주 중요한 통찰이에요.
세계를 자신만의 ‘기억’으로 ‘응축’해서 본다.
“너는 왜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긍정적)으로 보니?” 세상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이죠. 자신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데, 누군가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볼 때 답답하잖아요. 반대로 자신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데, 누군가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세계에 대해서 규정하며 말하죠.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희망)적이지 않아!” 이는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가요?
세계는 무한한 ‘운동’(진동)의 조합이에요. 우리는 그 ‘운동’(진동)을 자신만의 ‘기억’으로 ‘응축’해서 세계를 ‘지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기억’을 갖고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각자만의 세계를 ‘지각’하는 거예요. 즉, 그들에게는 저마다 세계 속에서 사는 거예요. 철학(예술)에 관심 없는 이들과 철학(예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결코 같은 세계에 살지 않죠. 전자의 세계는 철학(예술)이 없는 세계고, 후자의 세계는 철학(예술)이 넘쳐 나는 세계니까요.
마찬가지로 사랑받은 이의 세계와 사랑받지 못한 이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요. 그 두 사람이 같은 세계에 산다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사랑받은 사람들이 삶을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겠죠. 그렇다고 해서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너는 왜 세상을 똑바로 못 봐?”라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건 무지로 인한 폭력이에요.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 세계는 눅눅하고 음습하고 꿉꿉한 세계예요. 다 포기하고 싶은 세계예요.
세계는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사랑받지 못한 이는 영원히 자신의 세계, 즉 눅눅하고 음습하고 꿉꿉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죠. 사랑받지 못한 이의 세계가 절망적이고 암울한 세계인 이유는 뭔가요? 바로 그의 ‘기억’, 즉 사랑받지 못한 ‘기억’ 때문이잖아요. 사랑받은 이의 세계와 사랑받지 못한 이의 세계가 다르듯, 사랑받지 못한 이의 세계 역시 달라질 수 있어요. 사랑받은 ‘기억’을 하나씩 쌓아가면 그의 세계 역시 조금씩 유쾌하고 쾌적한 세계가 될 거예요.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죠. 눅눅하고 음습하고 꿉꿉한 세계에서 누군가를 사랑해서 사랑받는 ‘기억’을 쌓아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겠어요? 하지만 ‘나’의 세계라는 것은 ‘나’의 ‘기억’을 통해 지각된 세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사정은 조금 달라질 수 있어요. 우리가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세계가 절대적 세계라고 믿기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나’의 세계는 절대적 세계가 아니에요. 자신의 ‘기억’ 따라 재구성될 수 있는 상대적 세계에요.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거예요. 그 한걸음이 더해져 새로운 ‘기억’이 하나하나씩 쌓일 때마다 ‘나’의 세계는 점점 아름답고 환한 세계로 변해갈 거예요. 세계는 나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에요. 세계는 세계관일 뿐이에요. 세계관은 우리가 어떤 ‘기억’을 쌓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의 세계 역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죠. 이 삶의 진실을 너무 늦지 않게 받아들여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