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 느낄 수 없는 사람

‘실재 운동’은 가변적인 ‘질’의 성격을 띤다.

빛의 특정한 진동수(양)가 떨릴(운동) 때 그것은 빨강(질)이 되죠. 즉 ‘양’적인 ‘운동’은 ‘질’적 차이가 되죠. 이 과정의 내적 원리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역학이 연구하는 운동은 단지 하나의 추상이나 상징에 불과하다. 즉, 모든 실재 운동들을 상호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공통 척도, 공통 분모에 불과하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역학이 연구하는 운동은” 가짜 운동, 즉 수학적 혹은 물리학적 운동이에요.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실재 운동)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추상이나 상징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이는 ‘실재 운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죠. 이러한 “역학이 연구하는 운동”은 “모든 실재 운동들을 상호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공통 척도”의 기능을 해요. 수학과 물리학을 통해 자연의 흐름(실재 운동)을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그런 운동을 그 자체로 생각하면 그것들은 지속을 점하고, 이전과 이후를 전제로 하는 불가분적인 것들이다. 그것들은 시간의 잇따르는 순간들을, 우리 자신의 의식 연속성과도 어떤 유사성을 가짐에 틀림없는 가변적인 질의 성격을 띤 끈으로 이어준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하지만 ‘실재 운동’은 “그 자체로 생각하면 지속을 점하고”,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없는 “불가분적인 것”이죠. 이러한 ‘실재 운동’은 “가변적인 질의 성격”을 띠죠. 이것이 “우리 자신의 의식 연속성” 즉, 우리 “시간의 잇따르는 순간들을” 이어주는 것이죠. 우리의 의식은 매 순간 어떤 국면의 변화로 연속되죠. 아침에는 희망적이었다가, 오후에는 우울하고, 밤에는 절망적인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하죠. 이러한 ‘지속’(자신의 의식 연속성)은 나도 세계도 모두 “가변적인 질의 성격”을 띠고 있는 ‘실재 운동’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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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과 소리는 어떻게 포착되는가?


그렇다면 ‘실재 운동’은 어떻게 ‘질’의 성격을 띠게 되는 걸까요? 베르그손은 이를 색깔과 소리라는 자연현상으로 설명해요. 우리는 ‘빨강-파랑’, ‘연인-친구 목소리’의 ‘질’적 차이를 포착(구분)할 수 있죠. 그런데 ‘빨강-파랑’, ‘연인-친구 목소리’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양’적인 차이뿐이잖아요. 전자는 빛의 진동수 차이일 뿐이고, 후자는 음파의 진동수 차이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들의 질적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걸까요?


지각된 두 색깔의 환원 불가능성은 특히 우리의 여러 순간들 중의 어느 한 순간에 그것들이 수행하는 몇조 번의 진동이 응축되는 지속이 매우 짧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가?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빨강-파랑’은 서로 환원 불가능한 ‘질’적 차이를 갖죠. 그리고 그 ‘질’적 차이는 ‘양’적인 ‘운동(빛의 진동수)’의 차이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죠. 그런데 이 ‘양’(빛의 진동수)은 자연과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양’이예요. 베르그손이 설명한 예시로 설명해 볼게요.


색깔(질)은 빛의 진동(진동수와 파형)에 따라서 발생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이죠. 그 리듬 중에서 제일 느린 게 빨강이에요. 우리가 ‘빨강’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빛이 초당 400조 번을 진동할 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상태인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해요. 인간이 볼 수 있는 최소의 시간 간격은 0.002초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에요. 이는 우리가 빨간색(400조 번 진동/초)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최소 25,000년이 걸리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죠. 달리 말해, 인간의 시신경으로 있는 그대로의 ‘빨강’ 색을 보려면 25,0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25,000년은 고사하고 순간적으로 사과를 보는 순간 빨간색이라고 알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인간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초당 400조 번의 진동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압축(응축)시키기 때문이에요. 즉, ‘빨강’ 색이라고 “지각된 색깔은 몇조 번의 진동이 응축되는 지속이 매우 짧다는 데서 기인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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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은 ‘양’의 ‘응축’으로 포착된다.


무한한 다수성이 그 순간들을 하나하나 분절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지속 속에서 응축되어야 하는 필연성 때문에 그 두 항의 외관적 차이를 할당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무한한 다수성”은 세계 즉, 무한한 ‘운동’(진동)들의 연합을 의미해요. 이 무한한 ‘운동’(세계)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들을 하나하나 분절”해야 하죠.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죠. 그러니 그 무한한 ‘운동’은 필연적으로 아주 “짧은 지속(시간) 속에서 응축”되어야겠죠. 즉 무한한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응축’이라는 필연성이 필요하겠죠. 바로 그 (무한한 ‘진동’을 ‘응축’해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에 ‘빨강’ 혹은 ‘파랑’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두 항의 외관적 차이”가 할당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 지속을 잡아 늘일 수 있다면, 즉 그 지속을 더 느린 리듬으로 살 수 있다면, 그 리듬이 늦어질수록 그 색깔은 창백해져서 아직도 틀림없이 색채를 띠고 있겠지만 점점 더 순수한 진동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데로 가까워지는 연속적인 인상들로 늘어나는 것을 보지 않을까?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만약 우리가 그 ‘응축’된 “지속을 잡아 늘일 수 있다면, 즉 그 지속을 더 느린 리듬으로 살 수(볼 수) 있다면”, 빨간색은 “더 창백해져서 점점 더 순수한 진동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상태로 드러나게 될 거예요. 색깔(빛)만 그런가요? 음악(소리) 역시 마찬가지죠. 소리의 단위는 ‘헤르츠Hz’(초당 진동수)예요. 즉 소리도 빛과 마찬가지로 결국 초당 진동수인 거예요. ‘도레미파솔라시도’ 연주할 때, 그 안의 개별 음들의 진동(파형)을 느낄 수 있나요? 느낄 수 없어요. 그저 낱개의 음들이 ‘응축’된 선율을 느낄 뿐이죠.


음악을 들을 때 ‘도’ ‘레’ ‘미’ … 낱개 음계만의 독특한 진동(파동)이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 진동(파동)을 다 듣지는 못하잖아요. 만약 순식간에 지나가는 수많은 개별 음(진동)을 다 들을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음악을 들을 수 없어요. 빛의 진동수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빨간색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초당 몇천 번을 왔다 갔다 하는 개별 음(진동)들을 ‘응축’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응축’된 소리가 바로 선율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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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 느낄 수 없는 사람


결국 ‘질’적 차이의 포착은 무한한 ‘양’을 ‘응축’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그렇다면 그 ‘응축’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서 ‘기억’의 중요성이 드러나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진화하며 긴 시간 쌓아왔던 ‘기억’들이 있죠. 바로 이 인간적 ‘기억’이 엄청난 진동수(양)를 ‘응축’해서 특정한 색깔 혹은 소리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특정한 동물들은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고, 또 특정한 소리를 들을 수 없죠. 반대로 또 어떤 동물은 인간은 볼 수 없는 색을 보고, 인간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죠. 이는 그 동물에게 특정한 ‘운동’(진동)을 응축할 수 있는 ‘기억’이 있거나 혹은 없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가시광선, 가청주파수의 영역만 보고 들을 수 있잖아요. 이는 인간에게는 가시可視 혹은 가청可聽의 영역에 있는 ‘운동’(진동)만을 ‘응축’할 수 있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죠. 이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존재(종種)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개별적인 사람에게도 적용돼요.


음악을 듣고 무엇인가를 느끼거나 감동을 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요. 이는 각 사람에게 다른 진동(파형)이 들어가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청각에 이상이 없다면 똑같은 진동이 고막을 때렸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소리를 ‘음악’을 듣고 감동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소음’으로 받아들이죠. 그 차이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개인적 ‘기억’ 때문이에요.


‘특정한 진동을 응축할 수 있는 기억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은 특정한 진동을 어떻게 응축시킬 기억이냐?’의 차이인 거죠. 그림(색과 선)도 마찬가지죠. 그림도 결국 ‘운동’(진동)이에요. 그림을 본다는 건 특정한 ‘진동’이 우리에게 온다는 거죠. 빛에 반사된 색과 선의 진동을 그 자신의 ‘기억’이 어떻게 응축할 것이냐에 따라 그림에서 감동을 느끼기도 하고 또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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