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신을 오해하는가?

인간의 ‘질’은 ‘정체성’이다.

인간의 ‘질(정신)’은 무엇일까요? 즉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한 사람의 고유한 색깔(혹은 소리)은 무엇일까요? 바로 ‘정체성identity’이죠. ‘정체성’은 한 사람의 ‘정신’이고, 이는 그의 ‘실재 운동’이죠. 즉 ‘정체성’이라는 것은 “한 사물(양)의 이동이라기보다 한 상태(질) 이동”이죠. 달리 말해, 한 사람의 마음 ‘상태’가 변화하는 경향성(진동)이 곧 그의 ‘정체성’인 거죠.


‘정체성’은 고정된 성질이 아니죠. 집에서는 자상한 ‘상태’이지만 직장에서는 냉정한 ‘상태’로, 다시 체육관에서는 열정적 ‘상태’로 이동하는 삶의 리듬(운동)이 바로 한 사람의 정체성인 거죠. 한 사람의 ‘실재 운동’ 자체, 즉 그가 어떤 리듬(운동)을 갖고 살아가느냐가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구별하게 해주는 ‘정체성’인 거예요.


그렇다면 한 사람의 ‘정체성’에 “한 사물의 이동”, 즉 ‘양’적인 변화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죠. 인간의 ‘양(물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신체’(물질)이자, 그 ‘신체’가 마주하는 ‘물질(양)’적 환경이겠죠. 이런 ‘양’적인 변화를 ‘정체성(질)’의 변화에 적절하게 연결 짓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죠. ‘정체성’은 ‘정신(질)이기 때문에 ‘물질(양)’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이는 ‘정체성’에 대한 오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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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해하는가?


‘나는 명료하고 차분하며 배려심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적절한 판단일 수 있죠. 그런데 그가 지독히 경쟁적이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직장에서 10년을 일 한 이후에도 그 판단은 여전히 적절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는 혼란스럽고 급하며 이기적인 ‘정신(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러한 ‘정체성(질)’의 변화를 포착하지 못할 수 있죠. 오히려 자신이 어떤 ‘양(물질)’적 환경에 놓여 있던 자신의 ‘질’인 ‘정체성(정신)’은 늘 일정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흔하죠. 쉽게 말해, 혼란하며 급하며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여전히 명료하고 차분하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 수 있죠. 이처럼 우리는 종종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오해하죠.


‘정체성’은 유동적 경향성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이해하죠. 이러한 오해는 ‘양(물질)-운동-질(정신)’의 관계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에요. ‘물질’과 ‘정신’, 혹은 ‘양(신체와 그 신체가 처한 환경)’과 ‘질(정체성)’은 결국 ‘운동’을 통해 연결돼요. ‘양(물질)-운동-질(정신)’은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종종 우리는 ‘물질(신체)-운동-정신(정체성)’을 분리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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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체성’은 ‘나’의 운동이다.


흔히 ‘물질’(신체)과 ‘정신’(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여기잖아요. (후각이 발달한 네 발 달린) ‘물질(신체)’로서의 개가 있기 때문에 개의 ‘운동’이 있다고 여기죠. 또 개는 개로서의 ‘정신(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개처럼 ‘운동’할 수 있다고 여기잖아요. 이는 세계의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죠.


‘운동’이 곧 ‘물질(신체)’이고, ‘정신(정체성)’이에요. 개는 개의 리듬으로 ‘운동’했기 때문에 후각이 발달한 네 발 달린 ‘물질(신체)’로 드러나게(진화) 된 거죠. 인간 역시 마찬가지죠. 인간은 인간의 리듬으로 ‘운동’했기 때문에 지성을 갖춘 직립보행이 가능한 ‘물질(신체)’로 드러나게 된 거죠. ‘물질(신체)’이 있기 때문에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곧 ‘물질’(신체)인 거예요.


‘정신’도 마찬가지죠. 개가 개로서의 ‘정신(정체성)’을 갖는 이유는 개의 리듬으로 삶을 ‘운동’하기 때문이죠. 인간도 그렇죠.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리듬으로 삶을 ‘운동’하기 때문이죠. ‘정신(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곧 ‘정신(정체성)’인 거예요.


‘나는 이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야.’ 이는 사실 할 필요도 없는 말이에요. 자신의 ‘정체성’은 이미 그 자신의 ‘운동’으로써 이미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에요. ‘운동’으로 인해 드러나는 ‘양(신체)’들이 곧 ‘질(정체성)’이 되는 거예요. 매일 꾸준히 공부하는 ‘A’와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B’가 있다고 해봅시다. ‘A’는 공부하는 삶의 리듬으로 특정한 지식(양)을 구축할 테고, ‘B’는 운동하는 삶의 리듬으로 특정한 근육(양)을 구축할 테죠.


이때 지식과 근육은 단순한 ‘양’일 뿐인가요? 그렇지 않죠. 그 ‘양(지식·근육)’은 “어떤 수의 순간들로 자신의 존재에 리듬을 줌으로써” 그 자신의 ‘질(정체성)’로 드러나게 되죠. 공부하는 삶의 리듬(운동)을 갖고 있는 이들은 지식의 ‘양’이 쌓여 ‘지식인’으로서 ‘정체성(정신)’을 갖게 되고, 운동하는 삶의 리듬(운동)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근육의 ‘양’이 쌓여 ‘운동인’으로서 ‘정체성(정신)’을 갖게 되잖아요. 이처럼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리듬(방식·궤적), 즉 ‘운동’에서 만들어진 ‘양’이 곧 우리의 ‘질(정체성)’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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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변화는 ‘운동’의 변화다.


우리는 종종 ‘질’적인 변화를 바랄 때가 있죠. 기존의 ‘정체성’을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기를 바랄 때가 있죠. 직장인의 ‘정체성’을 벗어나 탐험가의 ‘정체성’을, 가정주부의 ‘정체성’을 벗어나 소설가의 ‘정체성’을 바랄 때가 있죠.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신(질)’적인 결심을 하기보다 먼저 삶의 리듬(운동)을 바꿔야 해요. 기존 삶의 리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리듬을 구성해야 해요.


평일에는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늦잠을 자던 삶의 리듬에서 벗어나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주말이면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는 삶의 리듬을 구성하는 거죠. 그러한 ‘운동’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그 ‘신체’가 처한 환경이라는 ‘물질(양)’적 토대를 새롭게 구성해야 해요. 그 ‘물질’적 변화를 통해 발생하는 ‘운동(진동)’이 곧 ‘질(정체성)’적인 차이를 만들 거예요. 직장인 너머 탐험가로서, 가정주부 넘어 소설가로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질’적 도약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죠. 결국 ‘양(진동수)’적인 ‘운동’이 ‘질(경향성)’적 차이를 만드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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